지난 5월 20일 계명공동체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선포했다. 지난 60년간 계명공동체는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겉으로는 전국 최고의 생태적 캠퍼스와 학생 수를 자랑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겉모양의 화려함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속 알맹이다. 속의 내실화는 향후 계명공동체에 부여된 주요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계명공동체의 모습은 어떤가. 마치 꿀단지에 빠진 파리와 같다. 삶은 달콤한 것이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삶에 깊이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우리는 꿀에 홀린 파리처럼 더욱더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구속되며 좌절한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우리는 타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소유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인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듯하다. 하나는 의식적인 주체로서의 ‘나(a)’로, 권모술수를 잘 부리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잘하는 일종의 덫에 걸린 존재다.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본성의 일부로서의 ‘나(b)’인데, 이 ‘나’는 아름다운 존재이면서도 절망적인 한계를 지닌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전자의 ‘나(a)’는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자부한다. 그리하여 항상 후자의 ‘나(b)’를 깔본다. 그것은 주로 ‘나(b)’의 심술궂음, 즉 ‘나(b)’가 ‘나(a)’를 끊임없이 곤란에 빠뜨리는 것에 대하여, ‘나(b)’가 고통스럽고 짜증스러운 병에 너무도 쉽게 걸리는 것에 대하여, ‘나(b)’가 쉽게 닳아빠지는 육체를 지니고 있음에 대하여 그리고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음에 대한 것이다. 이들 두 ‘나(a)’와 ‘나(b)’는 각자 이런 식으로 생겨먹었기 때문에 두 존재를 궁극적으로 커다란 하나의 ‘나’로 통합시키려는 행위는 몹시 힘든 노릇이다.
나와 나의 본성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분통터지는 것은, 그것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 오히려 변덕스러움에 그 매력이 있는 아름다운 여인 같다. 그러나 변화는 단순히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진실로 모든 사물은 변화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앞의 물이 흘러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올 수 없는 강물과 같다.
인간의 육체는 움직이고 순환하고 호흡하고 소화하는 등 복합적인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다. 만약 변화를 거부하고 생명에만 매달려 숨을 멈춘다면 이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일 뿐이다. 육체와 의식은 변화하는 흐름의 일부이며 그 산물이다. 의식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라. 그러면 ‘나’라는 의식은 단지 경험, 느낌, 사고,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정이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경험은 기억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좀 딱딱하고 정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고정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혼동함으로써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어왔다. 이런 식의 사고가 삶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흐름’으로부터 ‘고정됨’을 추출해 내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계명공동체는 주어진 삶, 현재적 실재, 거대한 흐름, 영원한 현재라고 부르는,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밝은 앎(계명)을, 그 ‘어떤 것’으로부터의 단절이 없는 앎을 채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깨어 일어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