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 제목을 패러디해 여러분께 던진다. 코로나19와 더불어 살기 시작한 지난 1년이 지나고 새롭게 맞이한 신학기에 이렇게 묻는 것이 뜬금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씩 세상을 약간만 삐딱하게 바라보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가 보이진 않을까?
노자의 도경 1장에 道可道 非常道라는 문구가 있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참 많은 사람이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치가, 기업가, 의료인, 학자들은 마치 자신만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주장하고 반 시민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마치 전문가인 양 주장하면서 다른 이의 견해를 무시하곤 한다. 고용인은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근로자를 선호하고, 피고용인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는 의미로 노동자를 선호한다. 같은 사람인데 마치 다른 사람인 양 근로자와 노동자를 외친다.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하는 노자가 우리 시대에 나타난다면 앞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를 따르고 있다고 인정할까?
어디 노자만 그럴까? 예수님은 어땠을까? 예수님이 특정한 계율만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찾기 어렵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을까? 아마 초기 기독교인의 공동체 생활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유대인 역사학자는 자신의 저술에서 초기 기독교인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함께 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그 내어놓은 것을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재화는 항상 모자라지 않고 남는다고 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 생기는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희년을 두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기도 했다. 단지 말로만의 희년이 아니라 행동의 희년으로. 얼핏 공산주의 사고와 유사할지 모르지만, 공산주의는 인간을 도구로 보지만 기독교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각자가 자신의 것을 독차지하고 남의 것을 탐내며 사는 모습이 아니라 함께 사는 모습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노자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우리는 너무 중독되어 살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아전인수격인 정치적 주장,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노사관계, 영리적 의료업무, 연구업적의 무분별한 양산, 모범생의 특권의식 등에 중독되어 나 이외의 모든 이의 주장은 틀렸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남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과 중독에 빠져 지성인이 아닌 지식인으로 전락해 살고 있지는 않는가?
새로운 생명이 시작하는 이 시기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모든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번 도전해 보지 않겠는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사람이 항상 공존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우리를 삶의 파멸로 이끌어가는 모든 중독에서 벗어나 보는 건 어떨까.
진달래와 개나리가 함께하는 시기에 차 한잔을 하면서 道可道 非常道를 세상에 외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