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막연한 분노를 느껴 불특정 여성들의 치마에 불을 붙인 20대 남성, 시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기구한 삶,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15세 여학생을 성추행한 업주, 30대 결혼이주여성을 때리고 강제 추행한 10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을 때리고 학부모를 무고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후 자신에게 불리한 목격자 진술서를 냈다며 법원에서까지 또 다른 학생을 폭행한 교사 등. 어제오늘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한 우리사회의 추악한 맨얼굴이다.
우리사회가 도덕적 해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물질적 풍요만을 무작정 쫓으며 달려온 삶의 이면에는 이렇듯 정신적 빈곤이 똬리를 틀고 있다. 도덕적 혼란의 징후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유아 살해, 총기 학살, 성적 학대와 같이 도덕적 동요를 보여주는 증상들, 즉 단일한 사건이 폭넓은 공포를 야기하는 현상에서 도덕적 혼란의 일정한 패턴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확실성이 사라지고 도덕적 혼란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적 진보와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는 급속하게 도덕적 공황에 시달리고 있다. 도덕적 혼란이 일어나는 데는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 대중매체는 이윤 창출을 위해 서슴없이 섬뜩한 불안을 조성하며, 그 과정에서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공포를 양산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시민의 능력은 증대한 반면에 그것을 소화하고 이해하는 시민의 역량, 즉 도덕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늘 새롭게 제기되는 도덕적 요구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도덕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새로운 답은 없다. 교양교육을 강화하면 된다. 지금까지 여러 장애도 있었지만 교양교육은 언제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교양교육이란 과학과 실용적 주제는 물론이고 예술과 인문학도 포함하는 교육을 뜻한다. 문학, 역사, 예술 감상 교육은 인간의 삶을 더 잘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며, 특히 인간 경험의 본성과 다양성에 관해 깨우치도록 해준다. 그럴 때 나는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의 인생관, 세계관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나에 대해 타인도 공감과 존중을 보낼 때 갈등과 분쟁을 빚었던 차이는 해소되거나, 적어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이상적일 수 있다. 또한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나쁜 사람이 있게 마련이므로 교양교육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더 나은 인간형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식의 결핍과 지혜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무지와 이기심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포획된 대학의 기업화와 더불어 대학교육은 주로 경제생활에 참여하는데 초점을 맞춰 실용학문을 중시하면서 교양교육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에 관해서는 반복할 필요가 없다. 교양교육의 목표는 사람들이 평생토록 배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방식을 가르쳐 주는 데 있다. 도덕적 위기는 언제든 새롭게 까다로운 양상으로 닥쳐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사려 깊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준비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서의 사태들에서 보듯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도덕적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