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부엌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네, 선술집에서 유쾌한 술판을 벌이는 남정네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런 장면들을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성인, 군주, 영웅 등을 그렸던 이전 전통과는 달리, 이들은 주변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한 장면들로 시선을 옮겼다. 이러한 부류의 그림들을 ‘장르화’라 부른다. 장르화는 그 외양만 보면 다른 지역에서도 흔한 ‘풍속화’와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장르화를 범주적으로 풍속화와 구별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네덜란드인들만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인간에게 극히 비친화적인 자연 환경을 극복해 왔을 뿐 아니라 최강 스페인 군대의 침략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싸워 이겼다. 삶을 위협하는 자연과 끊임없는 강대국들의 야욕 등, 그들은 언제나 공포와 위험 속에 있었다. 때문에 장르화에 묘사된 ‘평화로운 일상’이란 평범한 삶의 무익무해한 반영도 아니고, 도시적 삶에 지친 부르주아들의 목가적 취향의 투영도 아니다. 그것은 고단한 투쟁을 통해 마침내 쟁취한 승리의 산물이었다.
약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다. 너무 당연히 누려왔기에 소중한 줄 몰랐던 ‘일상’이 이제는 어렵게 투쟁하여 마침내 이르러야 할, 꿈같은 ‘이상’이 된 것이다. ‘전쟁’의 반대말은 ‘일상’이라는 말이 있듯, 현재 이 행성의 모든 거주민들은 전대미문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앞서의 두 세계대전에서는 인간 집단끼리의 직접적 무력 대결을 통해 승패가 갈렸다면,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공동의 적과의 싸움에서 어떤 집단이 슬기롭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리고 앞서의 두 전쟁에서처럼 이 세 번째 전쟁도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이끄는 나라들’과 ‘이끌리는 나라들’을 구분하는 기준도 바뀌고, 두 집합에 속하는 원소들도 교체될 것이다. 나아가 탈도시화, 탈세계화, 탈금융화 같은 단어가 회자되고 있듯, 인류의 보편적 삶의 양식 자체도 크게 바뀔 것이다. 또한 그리하여 지금까지 ‘일상’인 것으로 여겨 온 것들이 더 이상 일상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뉴 노멀’이니 ‘포스트-코로나’이니 하는 말들이 벌써 익숙한 관용어가 되었듯이, 앞으로의 일상은 전혀 낯설 것이며, 지금까지의 일상은 재연 불가능한 영원한 과거사가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극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사회철학자 로젠슈토크-휘시의 말은 약간의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혁명으로부터>라는 저서에서 그는 대규모의 전쟁이나 혁명들이 많은 억울한 사람들의 희생을 초래했음에도, 마치 어떤 마법이 작용하듯 인류 역사는 그러한 불행들을 통해 오히려 진보해 왔다고 분석한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재앙이 필요조건인 것처럼 보는 그의 태도는 석연치 않지만, 적어도 재앙을 재앙으로 끝내지 않았던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고 보는 해석은 분명 힘을 준다. 바이러스가 걸어 온 이 전쟁은 이미 불가피한 현실이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이길 것인가에 따라 우리는 오히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운 역사를 누리는 행운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뉴 노멀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길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