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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기술과 적응

서기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는 바티칸과 스페인을 점령하고,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노예무역을 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청나라는 영국에 마카오를 두 번째로 점령당했고, 일본이 나가사키 항구에 들어온 영국 군함 페이튼호에게 굴욕적인 일을 당한 것도 같은 해였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당시의 국가 재정, 경제, 군사력에 관한 주요 데이터를 담은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기록물을 만들었다.


만기요람에는 당시 조선의 군대가 보유했던 무기의 종류와 개수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활 3만여 부와 조총 4만여 자루, 그리고 납으로 만든 탄환 5백75만 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총과 함께 활이 조선후기 까지도 중요한 군사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통해서 총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조선은 조총부대를 창설하여 운용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백년 이상 활을 중요한 무기로 인정하여 활을 무기로 하는 궁수들을 양성하였고 부대도 운용하였다. 왜 조선의 군대는 활을 버리고 총으로 완전히 전환하지 않았을까. 


조선의 활을 각궁(角弓)이라고 불렀는데, 각은 뿔이라는 뜻이다. 물소의 뿔을 사용해 만든 조선 각궁은 탄성이 매우 높아서 유효사거리가 1백50미터 정도였지만, 조총은 1백미터 미만이었다. 물소는 사계절이 따뜻한 곳에서만 키울 수 있었기에, 조선군의 활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뿔은 전량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다. 반면에, 조총은 철과 납으로 만들 수 있어 국내에서 재료 조달이 가능했다. 


활은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히려면 상당한 시간의 훈련이 필요했지만, 조총은 훨씬 더 짧은 기간에도 익히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활은 시위를 당기는 팔과 어깨에 피로가 와 연속사격에 한계가 있었지만, 조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되기에 누구나 연속사격이 가능했다.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기존 기술과 비교하여 실험하고 가성비를 따져봐야 한다. 당시 조선에겐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활을 버리고 총으로만 갈 것인가, 활을 지키고 총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총과 활을 모두 갖고 갈 것인가. 조선의 군대는 마지막을 선택했고, 이 선택으로 조선은 각궁의 생산 기술을 지켰지만, 조총이란 신기술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쳤다. 오늘날 활은 이제 개인 취미생활이나 올림픽 경기에서나 사용되는 물건이 됐고, 총은 거의 모든 국가의 군사 무기가 됐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개인, 조직, 그리고 국가는 적응해야 할 것이 많다. 추위, 태풍같은 자연적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법, 규정같은 제도적 변화에도 적응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기, 자동차 등과 같은 기술적 변화도 무시할 수 없는 적응의 대상이다. 자연의 변화는 모두가 비슷하게 영향을 받는 탓에, 어쩔 수 없는 적응의 대상이다. 제도의 변화는 유불리가 있고, 손해와 이익을 보는 조직과 개인들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선택·적응해야 한다. 기술의 변화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이미 이루어진 변화이다. 배우기 어렵다고 애써 무시하기보다 기존의 것과 비교해 살펴보고, 필요하다 판단되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2022년. 인공지능, 빅데이터 같은 기술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돼가는 초기에 들어섰다. 새로운 에너지와 이동수단, 그리고 로봇이나 3D 프린팅 같은 생산수단에 이르기까지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기술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을 배우고 가르치려는 노력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그 변화를 애써 무시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술로 완전무장한 개인과 조직, 국가가 등장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사용한 조총을 처음 본 조선군 궁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탄환에 맞아 쓰러졌던 그는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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