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통과하며 죽음보다 낫지 않은 한 시절을 살아내기도 한다.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이런 상처와 아픔이 너무도 흔하다. 개인의 삶이 집단에 의해 철저히 짓뭉개졌는데, 개인자격의 대처조차 못하도록 이중으로 옥죔을 당한 이들이 많다. 시간마저 고령 생존자들 편이 아닌 듯해 초조함도 깊어진다. 뉴스타파의 세 번째 영화 <김복동>은 이 묵직한 고민을 담담히 풀어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 1992년 1월 이후 김복동이라는 한 사람이 살아낸 27년의 투쟁 기록이다. 평화운동가 김복동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영웅이었다. 영화는 명징하다. 문제는 보고난 이후다. 할머니들의 역사를 잘 몰랐으며 마주할 용기도 부족한 나 자신을 흔들어대는 울림이 있다. 자료를 뒤적여도 쉬 해소되지 않는 혼란도 동반된다.
여자의 인생에서 의미와 가치란, 누구의 딸로 태어났느냐에 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역경 속에서도 어떻게 개척해나갔느냐에 있을 것이다. 끝내 아버지의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 선례를 따라간 ‘아버지의 딸’일 뿐이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장본인 박근혜. 여기서 역설적으로 남은 것은, 일본정부와 친일세력의 “최종적, 불가역적”인 방향성 확인이었다.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살아있는 증거이자 미래를 건 싸움의 증인으로서 일인시위에 나섰던 구순의 김복동은, 그 역사적 순간에 박근혜의 대척점에 섰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다함께 이어온 기나긴 투쟁이었다. 할머니 운동가 한 분 한 분의 어깨와 등에는 흔적도 없이 전장에서 죽어간 30여만으로 추산되는 ‘나비’가 된 혼들이 함께였다. 그것을 믿지 않고는 노구를 이끌고 그토록 결연히 싸워올 수 없었으리라고 감히 헤아려본다. 스스로를 위해 이 고단한 싸움을 이어온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날 당도할 영예로운 배상과 명예회복을 누릴 수혜자 또한 후손인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미래세대를 위한 무한한 애정이 아니고는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을 가시밭길이었다. 아마도 이 싸움의 진정한 승패는, 누가 더 성숙하게 대응해나가느냐에 달려있을 듯하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다다른 어떤 너른 지평을 영화는 보여준다. 김복동의 증언집인 김숨의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에 나오는 표현처럼, ‘너른 발’이 되기를 염원하며 내딛어온 행보다. 사람다운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더’ 나은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다. 가장 나은 최선이어야 했다. 치졸함뿐인 가해국과 싸우는 동시에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드높은 정신적 성취를 고민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해 아무리 간구해도 답을 찾을 수 없던 절망을, 질문을 바꾸면서 행동으로 대신했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이어받을 숭고한 임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