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놨다는 것만으로도 기대작이었다. SBS 월화극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은 정말 으리으리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그런데 비밀이라면서 세상 모두가 안다. 영조(한석규 분)가 경종을 어떻게 했으리라는 추정 말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뒤에서는 다 수군댄다. 세자(이제훈 분)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힘도 없으면서, 세자는 부왕과 맞서려 한다. 너무 순진하거나 무모하거나 어리석다. 왕이 하도 곱게 키워 어리숙해진 것일까? 세자는 이름처럼 ‘선’하기만 하고 다른 능력이나 섬세함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의명분만 강조하는 그의 완고함은 나이든 아버지를 능가한다.
이 부자 사이의 적대감은 익숙하면서 어색하다. 세자는 거침없고, 왕은 모사꾼 같다. 왕은 매 순간 둘러싸인 신하들에게 협박과 주의를 받는다. 그 어떤 사슬이 왕을 칭칭 감고 있는 듯하다. 그에 비해 세자는 자유롭고 떳떳하다. 이 관계는 영조-사도세자가 아니라 얼핏 단종-수양대군을 연상시킨다. 세자가 젊은 국왕이고 영조가 왕위찬탈을 노리는 삼촌 같다. 아버지가 아들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고 왕위를 물려주려 애쓰는 ‘예상된’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세자가 부왕에 대해 최소한의 우위를 점하려면, 추악한 비밀을 아는 정도로는 안 될 듯하다. 부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곧 죽은 형 경종의 유령이라도 빙의돼야 하는 것일까. 그러려면 느닷없는 광기 따위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차곡차곡 갈등을 쌓고 폭발시켜야 한다. 극을 극답게 만드는 건 ‘사건’의 참혹함이나 크기가 아니다. 집요한 수사진의 범인 추적과정이 아니다. 뭔가 좀 더 치밀하게 유기적으로 맞물려져야 ‘비밀’과 ‘과거’가 제대로 값어치를 할 듯하다. 게다가 ‘백성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세자의 대사와, 너무나 어린데 터무니없이 중요해 보이는 배역 지담(김유정 분)뿐이다.
세월호 침몰의 책임자로 ‘추정’되는 유병언 회장을 잡기 위해 투입된 경찰병력이 170만명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수사과정이 ‘극적’이거나 ‘서스펜스’ 등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보여주기식 규모가 ‘흥미’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아쉽다. 각 배우들의 존재감은 분명 엄청나다. 자기가 출연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연기력만큼은 대단하다. 저 배우가 저 인물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듯해 보였다. 그러나 초반임을 감안해도, 극이 어딘가 ‘편년체(編年體) 서술’식의 김빠진 구조를 유지하는 건 안타깝다.
비밀을 비밀이게 하라. 비밀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다들 답과 과정을 알고 있는 듯한 태연함과 세자만 모르는 과거를 수군거리는 안일함으로는 그 어떤 추적도 어려울 듯하다. 궁금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살인사건의 배후 뒤로 배우들의 존재감마저 가려질까 저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