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드라마 중 최고 화제작은 <추노>였고 시청률 최고였던 드라마는 <제빵왕 김탁구>였다. 그러나 두 작품은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추노>는 애도(哀悼)도 벽두를 연 드라마였다. 죽은 벗을 묻어주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장면이 다섯 차례나 등장했다. 주인공들은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리면서도 어리석을 정도로 사람이 사람을 묻어준다는 것은 가히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벗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을지언정 시신만은 구해야 한다는 절대명제에 양반과 천민이 따로 없었다. 벗을 묻어주지 못하는 자의 말로는 까마귀밥으로 버려지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누구나 최선을 다해 벗을 만들고 그들의 안위를 정성껏 살피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주검을 제 손으로 수습할 수 없다는 것, <추노>는 그 묵직한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했다.
소포클레스와 장 아누이가 2천여 년 차이를 두고 쓴 희곡 <안티고네>는, 애도야말로 인간의 본분임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죽은 이를 장례지내고 묻어주는 그 기본 예의가 몹시 부자연스러워지고 묻어주는 일이 처벌의 대상이 될 때, 거기는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안티고네는 반역자로 몰려 매장이 금지된 오빠 폴뤼네이케스를 묻어준 죄로 크레온이 정한 ‘국법’을 어기고 사형수가 된다. 국법은 그러나 인륜을 저버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일조차 법의 이름으로 강요하기도 한다. 안티고네는 국법을 어기고 신들이 정한 자연의 법과 양심을 따랐다. 사람이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토록 정치적이고 실존적인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제빵왕 김탁구> 줄거리의 시초는 탁구의 생모가 낭떠러지에서 죽임을 당하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생모는 요행히 살아남았고, 살인을 지시하거나 방조한 자들의 죄는 말끔해졌다. 가족끼리의 살인 혹은 살인미수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재벌가의 두 아들 탁구와 마준의 빵만들기 대결 때도 마준은 탁구에게 독약을 먹인 바 있다. 피해자가 멀쩡해지는 순간 가해자는 아무 죄의식도 느끼지 않게 되는 구조다. 죽음을 남발하고 희롱하는게 스토리라인의 축이었다. 성공하는 자 1인을 위해 모두의 희생은 정당화되었다.
<추노>는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화두를 던졌다. 그러나 <제빵왕 김탁구>는 “네가 죽어줘야 내가 산다” 혹은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메시지를 최종회 전까지 강하게 풍겼다.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가 훼손되고 직전 대통령 묘역에 인분이 투척되는 일까지 겪은 이후, 한반도의 화해와 공존이 위협받는 기류까지 겹친 스산한 연말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숨졌다. 애도에도 편가르기와 계급차가 있었다. 평화의 소중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