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실록(實錄)이 아니고, 영화는 원작소설과 별개의 새로운 작품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 당연한 사실을 묵직하게 확인시킨다. 그런데 (말로는) 지당해 보이는 이 매체 간 차이와 고유성은, 실로 구현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원작의 성공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든, 반감시키든 모두 영화가 감당해야 할 몫이며 업보다. 어지간해서는 (소설보다) 재미있었다는 평을 듣기 어려운 것도 제작진을 힘들게 하는 점이다. 애초부터 ‘다른 길’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구상 없이는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영화 <남한산성>을 보는 동안 관객은 여러 번 감탄하게 된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영화에 더 몰입했다는 점도 귀한 성취다. 그야말로 사료-소설-영화의 삼각 꼭지점을 자유로이 오가면서도 영상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려던 이야기’를 유려하게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특유의 마치 성곽을 닮은 듯한 문어체마저 ‘입체’로 옮겨놓았으되 전달력도 살린 영화의 화법은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 ‘말(言)의 영화’였기에 말이 칼보다 무섭고 치열했다. 국운이 기울다 못해 혀끝이 칼끝보다 더 엄중했던 백척간두의 47일간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지금의 이야기’로써 돌아보게 만든다. 역사에도, 원작에도 매몰되지 않았다. 다만, 인물이 남았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삼전도의 굴욕을 소설로 다룰 때, 작가 김훈은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아예 기대를 버리고 썼다고 한다. 이 쓰라린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나가기 위해 문장은 칼끝처럼 다듬되 마음은 비워야 했으리라. 황동혁 감독은 문장수련의 한계치까지 밀어붙인 듯한 원작소설을 철저히 해독한 뒤, 완전히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각본상 받아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대로, 각본이야말로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이자 설계도임을 입증한 셈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탐독했을 때 같은 느낌도 준다. 독한 혀들에 휘감겨 매혹당한 ‘문학적’ 감동 말이다. 실존인물에 대해서는 ‘왜곡’이 어느 정도 있었을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은 처절한 고뇌를 대사로 녹여내며 심리전의 진수를 펼친다.
척화파도 주화파도 짚단처럼 주저앉은 허물어진 성을 지킨 것은 민초들의 평범하고 위대한 생명력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그 끈질긴 힘을 믿고 의지한다. 우리가 400여년 전의 춥고 슬픈 역사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혹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다. 연을 날리기 위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볼 줄 아는 조상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민들레가 꽃망울을 터뜨린 봄날을 핏속에 간직한 이들의 후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