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일일드라마 <다함께 차차차>는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과부가 된 두 동서가 서로 의지하며 한씨 ‘집안’을 꾸려가는 모습이 기둥 줄거리다. 남편을 잃은 두 동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형태는 기존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홀로 된 엄마들의 ‘강한 모정의 힘’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던 <다함께 차차차>는 새로운 시도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형적인 일일드라마가 왜 선호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일일드라마의 안정적인 구도―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건재한 ‘전통적’ 대가족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일일드라마의 중심에 놓인 가족들은 대개 별 탈 없어 보이는 집에 자녀들이 부모의 뜻을 거스른 연애와 결혼이 문제가 돼 갈등이 벌어지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이런 안정적인 구도를 깨며 일부러 결핍으로부터 가족애를 끌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유쾌한 가족드라마’를 표방했지만 쌍과부가 연상시키는 우울함과 비극성을 어떻게 ‘유쾌한 가족’ 이야기로 엮을 수 있을지도 부담이었다. 일부러 일일드라마의 ‘관습’들을 피해가며 다소 낯선 가족구도, ‘아버지’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더 ‘유쾌한’ 이 가족의 모습은 사실 기존 일일드라마 패턴에 익숙해진 시청자를 설득시켜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상처 많은, 남 보기엔 ‘결손’으로 보이는 집안을 사랑으로 봉합해가는 과정이라는 것도 난제였다. 자칫하면 설정은 60년대, 에피소드와 등장인물의 감수성은 2009년을 살고 있는 모양새가 될 위험이 농후했다.
이런 낯선 가족 패턴은 사실 전쟁 후 과부들만 집을 지키던 비극적 풍경을 ‘현대’로 옮겨온 듯한 그래서 더 슬픈 설정이기도 하다. 게다가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없었다. 동서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한 번 결혼했으면 남편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심지어 서로를 먹여 살리기까지 해야 하는 공생관계일까?
그거야말로 가부장적 결혼 제도의 폭압으로 여져진다. 남편이 있고, 그 남편과의 부부관계가 유효할 때만 성립될 수 있는 참으로 ‘허약한’ 관계를 운명적인 관계로 설정한 것부터가 실은 억지이며 그런 동서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도 한계였다.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은 살아 있고, 현재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있는 윤정(심혜진 분)의 운명은 가혹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진퇴양난이다.
<다함께 차차차>는 인지상정보다는 오히려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모든 것을 떠넘기고 있다. 쌍과부와 시어머니는 물론이고, 그 자식 세대 또한 연애와 결혼에 몹시 수동적이다. 그저 놓여있는 자리에서 아무 생각없이 사는 캐릭터들.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거나 수동적으로 움직이거나, 아무튼 그들에게는 치열하게 고민하는 존재로서의 생동감이나 주체성이 없다. ‘유쾌한 가족드라마’를 표방했지만 실은 도저히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이 풀 수 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등장인물들을 옭아매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사소한 일은 벌집 쑤신 듯 난리 피우고, 중대한 일은 사소하게 처리한다. 상식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갈등과 사건들이 줄줄이 펼쳐지니까 오히려 점점 더 진부해진다. 일일드라마가 왜 ‘일상성’을 답습할 수밖에 없는지, 그 속에 숨은 일상의 진실은 무엇인지 <다함께 차차차>를 통해 더 고민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