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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 버닝(2018)

이야기의 회복과 삶의 재탄생

마을 한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먼 옛날 일도 아닌데, 이미 완전히 단절된 삶의 방식이자 끊어진 이야기다. 우물은 본디 하늘과 땅 사이에 놓여 있었다. 마치 저승과 이승 사이 같았다. 생명의 근원이요 공동체의 젖줄이었다. 우물에 깃든 원초적 신성함에 관해 지금의 우리는 아예 잊었다. 빼앗긴 것일 수도 있다. 배고픈 리틀 헝거의 굶주림을 채워줄 두레박의 우물물도, 그레이트 헝거가 갈망하는 ‘삶의 의미’를 전할 이야기도 상실되었다. 흔적마저 보존하지 못한 우리가 뒤늦게 받는 천형(天刑)은, 무엇을 앓는지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의미와 허망함에 시달릴수록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집착하는 악순환도 반복한다.

이창동 감독의 8년만의 신작인 영화 <버닝>은 도발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하고 깊은 우물이다. 서사와 메타포, 이미지가 말을 걸고 스스로 부수고 확장하며 재탄생까지 한다. 모든 이야기를 품은 거대한 굶주린 자로서, 영화는 관객의 동참에 의해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해미-종수-벤이라는 이야기꾼 모두를 집어삼키고 전설 속의 불가사리처럼 거친 숨을 내쉰다. 노을과 안개 속에서 몸집을 불린 이 생명체의 움직임을 목도하며 관객은 전율한다. 모든 태울 것들을 삼킨 불꽃 속에서 벌거숭이로 막 태어난 ‘이야기의 생성’에 관한 비밀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저버릴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수단, 이야기. 모두의 ‘우물’을 찾아내 그 샘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필연이 여기에 있다. 과연 ‘이야기’를 떼놓고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조심스런 질문은, 관람 후 더욱 질기게 따라온다. 인간이 진정으로 매달리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돈인가? 집인가? 가족인가? 헛것들이 다 타버린 뒤에도 남을 영롱한 본질은, 관객들 각자가 가슴 밑에서 길어올려야 할 맑은 정화수(井華水)여야 한다.

삶의 연결고리를 못 찾은 채 그저 탄원인지 눈물인지 모를 춤사위만 반복하는 우리들. 남자도 여자도 무엇도 아닌 채로 그저 밥벌이에 지치고 때론 누군가의 눈요기나 놀이감이 되기도 한다. 벽처럼 보이는 문, 인형처럼 보이는 처녀들. 해미는 어쩌면 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해미는 적어도 자기의 샘을 지킨 자다. 이보다 더 고귀한 여성 캐릭터가 있을 수 있으랴 싶다. 종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한 자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두 번째로 태어나기에 이른다. 그리스 신화 속 에우리디케의 우물을 따라 들어갔으나 실패한 오르페우스를 넘어설 희망의 싹이다. 마르지 않은 샘을 되찾고 우주의 신비에 정화(淨化)된, 태초의 인간을 본다. 눈이 시리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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