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을 때 인간은 극도로 편향적이 될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은 때로 신앙보다 더 확고한 핑계가 되어 맹목(盲目)에 가속기를 달아준다. 모르기에 떳떳할 수 있다고 (비겁하게도)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모른다’로 일관하던 자가 결코 보지 않으려던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던가? 영화 <우상>이 던지는 숱한 질문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악평을 각오하고 우리 사회의 뇌관을 찌른다. 막상 정곡을 찌르고 보니, 질문은 무더기로 사방에서 쏟아져 내린다. <우상>이 주는 일차적 당혹감이다. 봇물 터진 질문은 더 많은 의구심으로 분열한다. 감수분열의 속도로. 답은 어디선가 속수무책으로 붕괴해버렸다.
이 영화는 가파르게, 통회(痛悔)하는 영혼의 ‘진심’의 흔적을 따라갔다고 본다.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때란, 생명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고 다른 것들을 중요시 여길 때다. ‘죽은 것’을 붙잡고 매달리느라 산 것들의 숨이 끊어지게 되는 일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마는 일이다. 누가 누구를 짓눌러야 굴러가는 시스템을 (폭력적으로라도)지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제단’에 바쳐온 것일까. 권력욕에 사로잡힌 구명회(한석규 분)나, 핏줄(실은 호적)에 집착하는 유중식(설경구 분)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미 동조자다.
불행의 연쇄 고리에 대한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면,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상황을 불러들인 저마다의 이기심이 있다. 참담하고 아프지만 외면해선 안 될 진실이다.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집요한 쳇바퀴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수진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기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냈다고 본다. 아직은 시기상조라 향내를 머금고만 있는, 련화(천우희 분)가 섰던 목련나무 꽃망울처럼 설익었을지라도.
환대받지 못할 줄 알지만 해야 되는 이야기가 있다. 기다려주었다면 능히 꽃피웠을 그 생명력을, 차마 받아줄 데가 없는 이 척박함 또한 우리의 처량함이다. 등장할 때도 ‘실종’이었던 련화는 마지막도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교통사고로 모든 게 시작된 이유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만천하에 ‘보이게’ 끄집어내서다. 남성과 여성이 ‘지배권’을 놓고 제도의 이름으로 치러온 전쟁들이 인류사를 피로 적셔왔음도, 파괴의 한바탕 회오리 속에서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한쪽이 한쪽을 제압해봤자 남은 건 핏물 흥건히 고인 바닥뿐이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버려뒀던 자신의 ‘가장 자라지 못한 부분’을 돌아봐야 할 때다. 우리가 깎고 다듬어 조각(彫刻)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미성숙뿐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