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정치가가 ‘살아있는 영혼’일 수 있으며 아름다운 바보일 수 있다는 것을 끝내 안 믿었다. 그를 믿어주기엔 우리가 살아낸 역사가 너무 척박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식지 않는 추모열기의 근원에는 깊은 죄책감이 있다.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믿지 않고 정치로 제 잇속 차리는 똑같은 ‘잡놈’ ‘도둑놈’으로 몰아간 것, 자신의 가치 전체를 부정당하고 결국 홀로 벼랑 끝에 서게 한 것에 대해 많은 국민이 가책을 느끼는 듯하다.
우리는 뒤늦게 오열하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는 슬프고 또 슬펐을 한 인간의 고뇌가 절절히 보였다.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홀로 떠나셨습니까?”
노무현의 고독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운명’이었다. 그의 고뇌와 결단, 성난 외침은 적과 동지 모두에게 외면받기 일쑤였다.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양산, FTA체결 등 시대의 거센 격랑을 거부할 수 없는 ‘위정자’로서의 진정성은 지지자들에게 먼저 버림받았다. 정책결정자로서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 기울였던 온갖 노력은 ‘너도 똑같은 놈’이라는 불신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이 그의 민주화투쟁 경력과 지역주의에 맞서는 ‘바보’라는 문화적 코드에만 열광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현실을 바로 읽고 멀리 볼 줄 알았던 그의 정책결정과정에는 다들 관심 없었다. 보라, 노무현의 FTA와 이명박의 FTA가 어떻게 다른지! 그는 정치를 썩었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심지어 자신을 이상화시키려는 이들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의 비전은 확고했고 구체적이었다. 서거 후 외신의 평가가 더 정확하고 후하다는 이 괴상한 느낌은 우리가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참으로 몰랐음을 증명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게 아니다. 아무도 후원금을 내지 않은 것에 대해 진짜 미안해해야 한다. 단돈 100원씩이라도 중단 없이 보냈어야만, 노무현을 지킬 수 있었다. 정치를 돈 없이 ‘꿈’만으로 할 수 있다는 착각, 도둑들의 소굴에 보내놓고도 혼자 알아서 독야청청하기를 바란 무책임, 그 무관심이 그를 죽게 했다. 검찰이 아무리 샅샅이 털고 뒤져도 박연차와 강금원뿐인 후원 없는 정치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퇴임 후 봉하를 거점으로 생태 밸리를 만들고 생산 모델을 확립해 ‘진보의 미래’가 되고자 했던 그에게, 정부와 경남도는 약속했던 예산 24억원조차 이유 없이 잘랐다. 그리고 ‘비리’를 캐기 위해 주변부터 샅샅이 죄인으로 만들었다. 대통령 특별교부금 6조를 전액 사회환원한 것은 보도조차 안했다. 연금을 담보로 대출받아 지은 빚투성이 집을 ‘아방궁’으로, 그를 ‘나쁜놈’으로 모는 보도만 넘쳐났다. 노무현이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을 지킬 줄 모르는 사회의 참극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서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진정성으로 매 순간 임했던 그분의 극락왕생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