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드라마로 즐겨도 되는 것인가. 생각이 많아진다. SBS 월화극 <육룡이 나르샤>는 제목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하게 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용비어천가>를 배운 사람이라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용비어천가 제1장에서 따온 제목이기 때문이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한자시니”
<용비어천가>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다음과 같다.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 목판본. 모두 10권. 여기서 ‘육룡’은 이성계과 이방원 외에 조선 건국 후 추존된 목조(穆祖) 이안사,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도조(度祖) 이춘(李椿), 환조(桓祖) 이자춘을 말한다.
‘용비어천가’라는 단어가 현대 국어에서 비유적으로 가지는 속뜻은,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사다. 그렇게 배웠다, 국어시간에. 국정교과서로 국어와 국사를 배우던 그 시간에도 말이다. 그때는 적어도, 비록 시험을 위해 암기는 했지만, 겉뜻과 판이한 속뜻도 들어있음을 함께 배웠던 것 같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말 그대로, 드라마로 풀어낸 용비어천가다. 겉뜻과 속뜻이 일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전의 왕조인 고려는 ‘거악(巨嶽)’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척결 대상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고려와는 완전히 무관하며, 오로지 ‘이성계’라는 장군 혈통의 왕조가 쿠데타를 통해 지배구조를 바꾼 조선이라는 나라에만 속하는 후손들인 양 그려지고 있다. 그런 이분법에 의거하지 않고는 감히 쓰지도 만들지도 못했을 ‘팩션 활극’이다.
팩션의 이름으로, ‘육룡’이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을 바꾸고 있다. 멋지고 늠름하고 잘난 영웅호걸 6인의 무용담으로 말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시작과, 이방원의 역성혁명 마무리를 드라마로 다루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육룡이 나르샤’라는 제목을 달고, 그들 집안을 ‘그저 멋있게’ 호쾌한 영웅담으로 그려내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박제돼 있던 ‘6조’를 하나하나 호명해,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 불러내놓고는 그저 ‘팩션’이라고 하면 끝나는 것인지 두려움마저 든다. 힘이 곧 정의라는 식의 태도도 그렇다.
연기 잘하는, 현재 주가 최고의 배우들이 총집합처럼 모여 있는 이 드라마의 짜임새는 물론 탄탄하다. 그러나 시청하려면 대단히 불편하다. 용비어천가를, 용비어천가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다시 온 것인가. 이것은 판타지 팩션이 아니다. 살육과 쿠데타로 얻은 ‘개국’을 옹호한 5공 시절 드라마들이 걸었던 합리화의, 2015년 버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