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스스로를 ‘현장 보고서’라고 했고, 영화는 스스로를 ‘가족 이야기’라고 했다. 조남주의 소설은 심각한 갈등 한복판에서 슬쩍 ‘소설적’으로 건너뛰며 발을 뺀다. 울타리 안을 맴돌며 주변의 넋두리를 한 몸에 받아 안아야 할지 모를 김지영을 두고 말이다. 첫 불쏘시개가 되는 것으로 소설은 임무완수였다. 대개의 소설과 달리 호칭부터 낯설게 하고 건조체를 유지했다. 제3자 시선의 객관화라는, 뉴스도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이 시대에 ‘이화(異化)’를 통한 동화(同化)에 성공했다. 영화는 애초에 전략과 갈 길을 달리했다. 김도영 감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숱한 삶의 고충 중 ‘우선순위’를 택했음을 분명히 한다. 남편은 처음엔 일일드라마 속 딱히 착하지도 못되지도 않은 남편처럼 굴다가 배우 공유의 이미지를 입힌 정대현 씨로 입체화된다.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고 무엇보다 집은 (소설의 24평보다 넓은)30평대다. 경제적 고민을 덜고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했다. 육아 초기에는 문명의 혜택조차 거의 안 통한다. 엄마는 이전 ‘스펙’이 어땠건 5천년 전 여인네들과 진배없을 과정에 놓인다. 공부와 일만 생각하고 살다가, 처음으로 자신이 ‘동물’임을 (울며)깨
사랑이야기와 외줄타기의 공통점은, 끊어질 듯 이어진다는 점이다. 위태로움이 정체성이고 본질이다. 걸음걸음마다 위기 아닌 것이 없으며 한 번 심하게 출렁여야 균형도 잡는다. 역설적이지만 분명한 건, 안전하고 안정되기만 해서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는 점이다. 영화 <버티고(Vertigo, 감독 전계수)>는 현기증 나는 일상, 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위태로이 버티던 서영(천우희)이 창밖 로프공 관우(정재광)와 마주하는 아찔한 고공 감성 영화다. 서영은 IT업체의 계약직 디자이너로 상사 진수(유태오)와의 비밀 사내연애에도, 꼬여만 가는 가정사에도 치이고 지쳐간다. 현기증을 뜻하는 영어단어는 버틴다는 우리말과도 닮았다. 배우들은 눈빛,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에 응축된 감정을 담아 ‘말라가는’ 일상의 세부를 표현해냈다. 이런 세상에서 멀쩡한 것들은 ‘정물(靜物)’뿐이다. 사람들은 휘청거리고 실수하고 튕겨져 나간다. 강화유리 외벽과 그 안의 소파와 벽에 걸린 그림... 굳건해 보이는 탕비실과 질서정연한 사무실. 허나 거기야말로 40층도 넘는 실로 까마득한 허공이다. 발 디딜 데 없이 누추한 사연들이 낱낱이 폭로되기에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마저 유리
묘한 영화다. 개인적으로 반했다. 두 번째 본 후에야 영화의 결이 보였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 푹 잠겨보는 것, 그래서 영화에서 줄거리가 차지하는 몫은 길 안내에 불과하며 러닝타임 동안 실제로 ‘달려야’하는 건 관객 자신의 주체적 감각 동원력임을 일깨운다. 다 잊은 줄 알았으나 떨쳐지지 않는 기억, 아무리 돌이켜봐도 아쉬운 순간, 그것마저 소환해 ‘다시’ 살아보게 한다. 우연히 들려온 라디오 속의 사연과 음악이 마음을 잡아끌 때처럼. 사랑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 한다.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 심지어 그것이 사랑임을 깨닫기도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해 어쩌면 가장 흔한 건 후회일지도 모른다. 못다 한 사랑을 다시 하게 된다면,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정법이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수없이 되짚어보는 상상이다. 멜로나 로맨스는 바로 이 상상에 힘입은 장르일 터다. 왜 사랑은 지나간 후에야 그 전체의 윤곽이 비로소 보이는 것일까? 멜로가 ‘불가항력’에 의지해 연인들을 갈라놓고 엇갈리게 하는 전략을 쓰는 이유다. 가슴을 찢어놓는 자책으로부터 관객이나 독자를 구원하는 동시에 감정 몰입을 이끌기 위한 방편이다.
여자아이의 성장은 남자아이가 자라는 방식과는 다를 것이다. 수많은 차이가 엄연히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남자아이보다 결코 ‘얌전’하거나 수월한 성장통일 리 없다는 점이다. 소녀들이 ‘무난히’ 클 거라는 편견 속에는 사실 사회적 강요가 배어있다.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다가 필요할 때만 나타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숱한 ‘평범한’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세상에 눈길 주는 이는 드물어도, 아이들은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성장을 거듭한다. 평범하다는 뜻은, 공부를 잘 해 눈에 띄거나 장차 서울대생이 될 법한 기대주 몇몇을 뺀 대다수를 가리키는 동시에, 큰 사고나 이변 없이 무사한 우리들 일상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 때 그 순간의 다리나 버스, 배를 비껴간 운 좋음 같은 안도 말이다. 김보라 감독의 “놀랍도록 성숙한 데뷔작” 영화 <벌새(House of Hummingbird)>는 1994년을 사는 중2 은희의 이야기다. 가장 보통의 중학생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은희의 요란하고 혼란스럽던 한 시절은 하필 그해 10월 21일을 지나며 마디를 남긴다. 성수대교 상판이 붕괴되는 사고로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했다. 불과 25년 전 어느 아침이었다.
드라마 <열혈사제>(SBS)는 유쾌하다. 일상에 단비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금토 드라마라는 편성까지 살려냈다. 웃음의 요체는 의외성이다. 성스러운 차림새의 가톨릭 사제가 주축인데 그의 과도한 언행은 ‘발광’에 가깝다. 김해일 신부(김남길 분)는 알코올 의존증 초기, 금연 금단 현상으로 인한 짜증 남발, 독설에 분노조절장애까지 갖췄다. 더 놀라운 건 그의 전직이 ‘국정원 대테러 특수팀’ 요원이라는 사실이다. 충격적인 일에 휘말려 방황하다 영혼의 구원자 이영준 신부를 만나 사제가 되지만, 노신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해일의 분노는 불붙는다. 이 사건으로 다혈질 가톨릭 사제와 구담경찰서 형사들이 공조 수사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성격 개차반의 ‘전문직’들이 등장해 온갖 요란을 떠는데, 한국영화 흥행작들을 순간순간 뻔뻔하게 오마주 혹은 패러디 한다. 헌데 어찌나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는지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익히 예상되는 지점이 있음에도, 이 드라마는 관습적 표현 대신 어처구니없게도 끝까지 가는 재미를 택해 신선함을 주었다. 온갖 장르의 극대치를 동원하지만, 지향점은 우리사회 환부를 도려내고자 하는 연대의식이다. 물론 김 신부의 멋들어진
KBS <산 넘어 남촌에는>은 현재 지상파 중 유일하게 농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다만 포맷에서부터 ’전원드라마’를 표방했다. 처음부터 한국 농촌 드라마의 전범인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식의 설정을 따르지 않았다. 도시와 유리된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세계가 아니고, 도시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그 마을에 뿌리박고 산 사람들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어쩌다 보니’ 공동체가 된 이들의 이야기다. 배경 또한 농촌이지만 벼농사가 아니라 과수원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아니다. 타지에서 모여들었지만 서로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여느 도시 이웃들과 비슷하다. <전원일기>의 김회장 댁처럼 마을 전체의 ‘어른’ 대접 받는 집안도 없다. 이제 실제의 농촌은 이슈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하다. <전원일기>가 농촌에 대한 한국인의 향수를 재생산했다면,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입장을 달리했다. 아예 환상 자체를 설정의 근간으로 삼았다. ‘우리는 과거에 이렇게 살았다’가 아니고, ‘농촌이 이렇다면 나도 가서 살고 싶을 텐데’에 기반을 둔 것이
상류층에 관한 이야기라면 대개 ‘위’를 쳐다볼 때의 호기심에 집중되곤 한다. 과연 보통 사람들과는 얼마나 다르게 사는지, 얼마나 화려한지 등등 ‘특이점’을 찾고 싶어 하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바탕에는 깊고 강렬한 선망(羨望)이 들어있다. 부럽지 않다면 관심이 갈 리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계급 혹은 계층은 있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문제는 사회경제적 ‘차이’가 엄존한다는 사실이 아니고, 각자의 맡은 바 역할을 왜곡시키거나 착각하는 데서 온다. 지금 우리 사회 상류층의 문제는 하한선(下限線)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한선의 사전적 풀이는 “최대한으로 낮아지거나 내려갈 수 있는 정도나 지점”이다. 더 이상 떨어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재벌가나 고위층이 범죄에 해당하는 물의를 일으키면 언론은 앞 다퉈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로 통용되는 이 낱말은 실상 우리의 현재 상태로는 어불성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적정선에 대한 한 모범에 가깝다. 적정선이라 함은 상한선과 하한선 사이 어디쯤의 절충이겠다. 그런데 하한선이 아예 없다면, 아
마음이 아프다가 이내 명치끝이 저릿해 옴을 느끼게 된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여유 부리고 싶으나 영화의 잔상이 떨쳐지지 않는다. 영화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Shoplifters)은 이 땅 어딘가에도 살고 있을 것 같은 고단한 인생들을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가 먹고사는 생활 기반이라는 게 실상 얼마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인지 한숨이 나온다. 올해 제71회 칸 국제영화제는 이 작품에 황금종려상을 안겨 주었다.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로 공감을 샀다는 뜻인데, 이 사회구조적 비극이 ‘피해갈 수 없는’ 문제란 얘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중 가장 흥행했다는 <어느 가족>의 이 역설적 ‘인기’ 또한 고민을 가중시킨다. 지금 당장의 세상 문제를 담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연금’ 외에는 달리 수입이 없는 식구들이 훔친 것들로 먹고 사는데, 알고 보니 이 가족 구성 또한 법의 입장에서는 ‘훔치는’ 방식의 범죄행위였다.세계 최강국 일본의 사회안전망은 ‘중간’이 끊어져가고 있다. 문제는 중년 세대와 중류층이 무너지면, 3대 전체가 연쇄적으로 파산한다는 데 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분명하다. 2006년 일본 비정규직 비율은
마을 한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먼 옛날 일도 아닌데, 이미 완전히 단절된 삶의 방식이자 끊어진 이야기다. 우물은 본디 하늘과 땅 사이에 놓여 있었다. 마치 저승과 이승 사이 같았다. 생명의 근원이요 공동체의 젖줄이었다. 우물에 깃든 원초적 신성함에 관해 지금의 우리는 아예 잊었다. 빼앗긴 것일 수도 있다. 배고픈 리틀 헝거의 굶주림을 채워줄 두레박의 우물물도, 그레이트 헝거가 갈망하는 ‘삶의 의미’를 전할 이야기도 상실되었다. 흔적마저 보존하지 못한 우리가 뒤늦게 받는 천형(天刑)은, 무엇을 앓는지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의미와 허망함에 시달릴수록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집착하는 악순환도 반복한다. 이창동 감독의 8년만의 신작인 영화 <버닝>은 도발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하고 깊은 우물이다. 서사와 메타포, 이미지가 말을 걸고 스스로 부수고 확장하며 재탄생까지 한다. 모든 이야기를 품은 거대한 굶주린 자로서, 영화는 관객의 동참에 의해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해미-종수-벤이라는 이야기꾼 모두를 집어삼키고 전설 속의 불가사리처럼 거친 숨을 내쉰다. 노을과 안개 속에서 몸집을 불린 이 생명체의 움
막상 가족과 ‘대화’라는 걸 시도해보면 우리는 하릴없이 이런 판에 박은 말이나 내뱉게 된다. “나랑 대화하기 싫어?” 때로는 혼잣말이 편하고 뒤돌아서 빨래하는 게 낫다. 부모들은 한탄한다. 아이가 어릴 땐 서로 잘 통했다고. 하지만 아이 입장은 다르다. 응당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부모한테 맞춘 것뿐이라고. 부모가 웃으니 그게 취미가 됐고, 부모가 좋아하니 자기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부모의 꿈인지 내 꿈인지 모르겠다는 폭탄선언도 나온다. 아직도 세상 떠난 아내의 밥을 매끼니 뚜껑 덮어 챙겨두고, 아들 뒷바라지로만 살아온 영화 <레슬러>(감독 김대웅) 속 귀보 씨는 항변한다. “이게 다 널 위해서야!” 과연 그랬을까? 실은 의심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너를 위한 게 아니라 내 욕심이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란 괴롭다. 우물쭈물하는 동안 자식은 외나무다리에서 원수 만난 격으로 대든다.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자는 식이다. 이쯤 되면 국가대표 선발전이나 금메달 겨루기 못잖은 전쟁 상황이다. 레슬링 전 국가대표 귀보(유해진 분)와 레슬링 유망주인 아들 성웅(김민재 분)의 대결은 흡사 성난 소싸움을 방불케 한다. 양보란 없다. 명분은 각자 충분하다. 내
사랑은 어렵다. 사랑 이야기는 이 어려움을 한도 끝도 없이 증폭시키곤 한다. 얼마나 극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지가 그 사랑의 애절함을 가늠케 한다는 듯이. 멜로는 갈수록 추락과 상승의 낙차 폭이 커진다. 그러나 험난함은 사랑을 가로막지 못한다. 모름지기 모든 사랑이야기는 결국 탈출의 서사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안온했던 모든 것이 실상은 벽이었음을 깨닫고 높다란 담장을 뛰어넘은 마지막 몸짓 그대로 연인들은 불멸로 남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표적이다. 영화 <바람의 색>은 일본 배우들이 등장하는 한국 감독의 영화다. ‘멜로 장인’ 곽재용 감독이 마술과 도플갱어 등 초자연적인 ‘신비’들까지 동원해 사랑의 본질을 치열하게 탐구한 독특한 신작이다. 천재 마술사 ‘류’는 세계 최초 탈출 마술 공연 중 예기치 않은 사고로 탈출하지 못해 연인 ‘아야’(후지이 타케미)와 이별한다. 연인 ‘유리’와 이별 후 무의미하게 살던 ‘료’(후루카와 유우키)는 뉴스를 통해 자신과 닮은 ‘류’의 실종소식을 듣고, 운명처럼 홋카이도에서 ‘유리’와 꼭 닮은 ‘아야’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도 마술처럼 매혹적이지만 홋카이도 바다의 유빙(流氷)이 압도적 장관인 판타지 로맨스다. 곽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