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의 생명체가 죽어간 현장을 12년 동안 밀착 취재한 영화 <삽질(Rivercide: The Secret Six)>을 보았다. 비밀과 비리의 핵심은 숫자 ‘6’에 있었다. 수심 6미터를 반드시 관철하는데 이 참극의 악취가 나는 이유가 있었다. 울분도 사치였다. 이렇게 되도록, 우리는 막지 못했다. 왜였을까?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이어서 또 하나의 질문이 꼬리를 문다. 비슷한 일이 또다시 비슷한 논리로 진행되면서 푼돈을 푼다면, 그때는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제라도 진심으로 정직해져야 한다. 정말 몰랐는가? 희대의 거짓말에 그저 속은 것일 뿐인가?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어 ‘불도저’라 불리던 그, BBK가 누구 것이냐는 명명백백한 사실관계조차 “주어 없음”이라는 교묘한 글자 배치로 비껴가며 대통령 당선을 거머쥔 그다. 여론의 반대로 그 탐욕의 집대성인 ‘대운하’를 전면 수정했을 것임을 정말 믿었다고? 믿음이 가서가 아니라, 믿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 아니었던가? 그의 말은 항상 일관적이었다. 뭉칫돈을 오가게 할 대규모 토목공사를 향한 VIP 지시는 한 번도 ‘수정’된 적이 없었다. 여론무마용으로 창작된 ‘사대강 살리기’라는
몰랐을 때 인간은 극도로 편향적이 될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은 때로 신앙보다 더 확고한 핑계가 되어 맹목(盲目)에 가속기를 달아준다. 모르기에 떳떳할 수 있다고 (비겁하게도)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모른다’로 일관하던 자가 결코 보지 않으려던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던가? 영화 <우상>이 던지는 숱한 질문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악평을 각오하고 우리 사회의 뇌관을 찌른다. 막상 정곡을 찌르고 보니, 질문은 무더기로 사방에서 쏟아져 내린다. <우상>이 주는 일차적 당혹감이다. 봇물 터진 질문은 더 많은 의구심으로 분열한다. 감수분열의 속도로. 답은 어디선가 속수무책으로 붕괴해버렸다. 이 영화는 가파르게, 통회(痛悔)하는 영혼의 ‘진심’의 흔적을 따라갔다고 본다.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때란, 생명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고 다른 것들을 중요시 여길 때다. ‘죽은 것’을 붙잡고 매달리느라 산 것들의 숨이 끊어지게 되는 일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마는 일이다. 누가 누구를 짓눌러야 굴러가는 시스템을 (폭력적으로라도)지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제단’에 바쳐온 것일까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있으나 매끈하게 조율할 수완은 없는 게 신인 시절의 한계다. 전체가 고르지는 못해도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과 감각이 눈에 띄고, 구멍이 있는 만큼 장점도 돋보인다. 이 장점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야말로 등용문(登龍門)에 오르게 한 비결이 아니겠는가. 신인의 부족한 점을 선배들의 노련함으로 (살짝)메워준다면, 놀랍도록 좋은 협업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공모 당선작을 완성된 드라마로 보는 재미와 감동이 여기에 있다. 물론 제작진 모두가 신인이어서는 안 되며 특히 배우가 전부 신인이어서는 안 된다. 연출이 베테랑일수록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신인의 패기와 생동감이 빛나는 데뷔작의 매력은, 이러한 숨은 선배들의 땀과 배려 덕택이다. TV단막극장은 시청자의 현재 관심사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탐색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단막극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자 실험무대다. 그런데 정작 단막극장에 대한 호응도가 높던 시절에는 제작비나 시청률을 이유로 갑자기 축소나 폐지가 결정되곤 했다. 물론 편당 제작비도 높고 공이 많이 들어가서 흔한 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프로그램일 수 있다. 당
영화를 보고 나면 ‘유연(柔軟)하다’는 낱말을 다시 찾아보게 된다. 부드럽고 연하다는 뜻풀이마저 어딘가 물 같다. 물처럼 소리처럼, 형체가 없으나 만져질 것 같은 어떤 것. 사랑은 그런 것일까. 잡아채지지 않으나 존재하고 있는, 이쪽이나 저쪽이라기보다는 그 너머의 아스라함에 가까운 묘연함.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서 주인공 윤영(박해일 분)은 (전직)시인이며 시의 리듬감으로 일상을 사는 사람이다. 십여 년째 시를 발표 못하고 ‘애매한’ 백수처럼 지내지만, 누군가 건드려 주기 전엔 목을 깃 속에 파묻은 거위처럼 웅크리고 있지만, ‘미친 것 같은’ 순간에 용기를 내본 이후 자기를 끌리게 한 리듬을 줄곧 좇는다. 유일한 할 일인 듯이 열심히. 좋아하던 송현(문소리 분)과 느닷없는 군산 여행을 감행한 후 분명 그의 고여 있던 십년에는 균열이 왔다. 영화는 상영 한 시간도 더 지나 중간쯤 되면 갑자기 영화 제목을 자막으로 띄운다. 윤영이 가장 외로울 순간이며, 시간 순서상 ‘왜 여행을 갔는지’를 설명하는 서울에서의 전사(前史)다. 카메라는 군산을 독특하게 담아냈다. 역사의 흔적이 혼재된 모습들이 생경하고도 아름답다. 군산이라는 공간에 취한다. 아니
가끔 판타지 장르물을 시청하다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기괴하거나 과격할수록 그 근간이 어딘가 현실의 시급한 문제를 정공법보다 더 잘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다.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통해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모두의 아픔이기도 하다. 여름내 tvN에서 방영했던 16부작 드라마 <아는 와이프>는 한마디로 ‘이프(if) 로맨스’를 표방했다. 시간을 12년 전으로 되돌려 ‘다시’ 살아보는 게 핵심이다. 2006년 6월의 어느 날이 반복되면서, 이후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한 가지를 바꿈으로써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요소가 달라져버리는데, 자식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시간을 돌려 ‘인연’의 경로를 틀어버리자, 12년 후의 자식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겨난다. 원래 2018년 8월을 살던 주인공 차주혁(지성 분)과 서우진(한지민 분)에게는 세 살 아들과 돌쟁이 딸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시간여행 이후, 주혁의 아내는 첫사랑 이혜원(강한나 분)으로 바뀌었다. 흔히 결혼한 남자의 환상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이고, 결혼한 여자의 환상은 ‘내가 결혼을 안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세간의 농담이 사실로 확인되는 셈이었다. 자식이 둘씩
한때 텔레비전에서 매일같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주 5회 방영되던 MBC <청춘시트콤 뉴 논스톱> 얘기다. 지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총 422부작이었다. ‘까까머리 조인성, 네모공주 박경림, 구리구리 양동근, 어리바리 장나라’가 대학에 가(기만 하)면 볼 수 있는 얼굴들일 줄 알았다는 시청소감이 있을 정도다. 10월 1일 방송된 MBC 스페셜 <청춘다큐 다시, 스물-뉴 논스톱편> 1부는 당시 갓 스물이던 배우들이 18년만에 한 곳에 모인 동창회를 보여준다. 스타가 된 그들은 ‘연기라기보다 그 나이 때의 자신’이었다고 회고한다. 정겨운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대중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과로와 자괴감과 싸우며 마냥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을 압박감, 심지어 ‘죽음’을 날마다 생각했으나 아무도 눈치 못 챘던 신인의 고통, 그 안에도 있었던 ‘구조조정’ 아니 해고, 환호 속에 살았으되 정작 자신은 전혀 기억이 없는 ‘연기 로봇’이었다는 고백. 그 속내를 이제야 털어놓는 그들 앞에서 고맙고 미안했다. 자신을 알리고 대중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가치’는 소중했지만, 그 때 그들은 별 준비도 갖춰지지 않은 촬영장에서
절묘했다. 박인제 감독의 ‘특별시민(The Mayor)’은 이른바 장미대선의 아주 특별했던 일정을 한가운데 품고 관객을 극장에서 만난 특별한 정치(政治) 영화였다. 극의 만듦새도 정치(精緻)하다. 개연성 있는 에피소드들, 배우들의 연기력과 카리스마 대결이 한 치 양보 없이 맞서는 터라 볼거리도 풍성하다. 대신 기존 정치극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관객을 사색하게 만든다. 짜릿한 결말로 가지 않고, 정치의 본질을 묻는다. 극중 현 서울시장 변종구는 대한민국 최초의 3선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후보다. ‘최초’라는 기록에 집착하는 이유도, 차후 대통령선거 출마 욕심이 있어서다. 변종구는 상황에 따라 표변하는 권모술수의 대가이다. 쇼맨십이 탁월하고 승부근성도 있다. 배우 최민식과 배역 변종구가 혼연일체가 돼, 보고 있으면 홀릴 지경이다. 검사출신 국회의원 심혁수(곽도원 분)라는 최고의 전략가도 곁에 두고 있다. 현실에 만일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TV와 각종 매체를 활보하며 유권자를 사로잡고야 마는 능력에 넘어가지 않기도 힘들 듯하다. 문제는 이들이 지지율 올리기에는 선수들인데, 실상은 대단히 사악했다는 점이다. ‘피 냄새’를 각종 ‘향수’냄새로 덮으려는(일시적인) 작
영화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The Artist: Reborn)>는 기발하다. 한 젊은 화가가 죽었다 살아나면서, 본의 아니게 ‘전설’과 ‘돈’의 아찔한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영화는 사람의 명줄마저 쥐락펴락하며 경매에 붙여 흥정하려드는 ‘미술품 시장’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과 자본에 대한 본질적 질문들을 던지는데, 방식은 발랄하다. 일종의 실험극 혹은 단편소설 같은 블랙코미디다. 덴마크에서 십 년 간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 지젤(류현경 분)은 귀국 후 무명 신인으로 푸대접 받다, 어느 날 유명 갤러리 대표 재범(박정민 분)의 눈에 띈다. 첫 전시회로 “뜨실 일만 남은” 꿈같은 상황에서, 지젤은 돌연 사망한다. 재범은 데뷔와 동시에 모든 작품이 유작이 된 지젤을 ‘전설’로 만들려는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상은 적중한다. 세상은 열광하고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그런데 지젤이 다시 살아나면서 일은 꼬인다. 이 소생 혹은 ‘부활’을 (거의)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 ‘작전’ 중이던 갤러리는 파산 위기에 직면하고, 스스로 지젤인지 오인숙인지 분열 상태에 놓인 화가는 삶을 이어갈 권리도 박탈당할 지경에 놓인다. “(너만) 죽은 척 살아주
곱다. 딱 누구나 꿈속에서 바랄 것 같은 ‘신혼’의 한 장면 한 장면 모음이다. 나영석 PD가 선보였던 신춘 예능 tvN ‘신혼일기’는 아기자기함 그 자체다. 실제 7개월차 신혼부부인 배우 구혜선과 안재현을 등장시켰다. ‘우리 결혼했어요’ 등등의 수많은 프로그램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다. 진짜 부부의 진짜 신혼생활로 거의 둘이서만 시간을 온통 채워야 하는 방식이다. 아내도 남편도 꽃 같은 외모의 청춘스타 출신이지만, 이 프로그램이 예쁜 이유는 따로 있다. 강원도 인제의 그림 같은 집, 휴가라기보다는 한동안의 긴 머무름인 거주기간,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오직 둘만의 시간과 관계에 대한 소통과 성찰로 채워지는 하루하루. 뉘라서 부럽지 않으랴. 결혼 중인 사람이든 아니든, 이 그림 같은 신혼일기를 보면 뭔가 아련해진다. 가장 순수하고 고운 ‘원형적 행복’을 떠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 고민이 끼어들지 않게끔 잘 고안되어 있다. 둘은 그저 둘이서 잘 놀면 된다. 신혼답게, 그들답게! 진짜 부러운 점은 바로 그거다. 우리도 그런 여유와 쉼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군들 사랑하는 이와 함께인 이런 장면을 꿈꿔보지 않았겠는가.
분명 ‘해피엔딩’인데 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일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나면 드는 생각이다. 이 영화는 실사보다 더 정밀한 아름다운 풍광을 한껏 배경으로 펼쳐놓은 뒤, 가장 찬란한 순간에 가장 슬픈 장면을 배치한다. 현란한 아름다움은 대폭발로 이어지는데, 보는 동안 몸이 덜덜 떨리는 충격을 받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흐느낌 같은 것이었다. 천년만의 혜성이 쏟아져 내리는 밤에 TV 생중계로 전 국민이 ‘축제’를 지켜보는 동안, 한 마을이 사라지고 만다. 모두가 슬픈 목격자인 동시에 생존자가 된 것이다. 기쁨의 환호성과 함께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진 얼굴들. 그들의 이름들. 간절히 불러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살려낼 수만 있다면,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불렀을 이름들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흥행은 이미 개봉당시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대중적 성향의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카이 감독은, 때로 다소 지나친 감이 있는 자신만의 색채와 화법을 이번에도 고수했다. 그가 대중적이 됐다기보다는, 이 영화의 ‘어떤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흥행
지난 봄은 지나치게 추웠고 여름은 못 견디게 뜨거웠다. 비는 한 번 내리면 삽시간에 홍수가 되어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계절이 몸을 바꿔 찾아오는 법을 잊은 듯하다. 천안함 수병들의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그리고 갈등과 반목과 전쟁의 공포까지 불러오고 말았다. 북한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증오가 다시 표면화됐다. 이 기시감 때문에 현기증이 난다. 금강산을 개성으로 오가던 길은 이제 완전히 끊겼다. 끊어진 것은 길 뿐 만이 아니다. 지금 ‘4대강 살리기’라는 아름다운 명분의 국책사업이 이 땅의 물길을 끊으려 하고 있다. 물을 넓히고 가두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경제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강과 바다를 통제해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이 국토 파괴를 정당화하고 있다. 흐르던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당연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건설 중인 ‘보’에 목숨을 걸고 올라가 공무집행 방해죄를 저질러야 하는가, 아니 그 정도의 미약한 개인적 저항으로도 대세를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4대강 살리기’는 물길을 끊고 생명등을 ‘죽이는’ 공사다. ‘살리기’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일 수 있는 미사여구가 아니다. 정부는 교묘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언어도단이나 다름없는 이름을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