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극장 문을 나선 이후부터 관객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스토리텔링을 시작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나서야, 그 두어 시간의 전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경우다. 그럴 때 관객은 잠시 ‘머물고’ 싶어진다. 여운이 남는다는 건, 오래 곱씹어보고 싶어진다는 게 아닐까. 정지우 감독의 <침묵>은 여운이 긴 영화다. 다 보고나서야 관객은 임태산이라는 주인공을 뒤집어 보고 다시 따져본 뒤 그의 깊은 침묵까지도 헤아리게 된다. 웬만한 영화에서 인물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원래 자수성가한 재벌인 임태산은 대단히 오만했다. “돈 앞에서 왜 오기를 부려?” 그러면서 세상 모든 이를 돈으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고 믿었다. 최민식이 연기한 그 남자는, 과연 돈이 많다. 부와 명예, 권력과 사랑까지 모든 것을 손에 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약혼녀 유나(이하늬 분)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유력 용의자로 하나뿐인 딸 미라(이수경 분)가 지목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미라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덮을 수 없는 쓰라리고 허무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
소설은 실록(實錄)이 아니고, 영화는 원작소설과 별개의 새로운 작품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 당연한 사실을 묵직하게 확인시킨다. 그런데 (말로는) 지당해 보이는 이 매체 간 차이와 고유성은, 실로 구현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원작의 성공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든, 반감시키든 모두 영화가 감당해야 할 몫이며 업보다. 어지간해서는 (소설보다) 재미있었다는 평을 듣기 어려운 것도 제작진을 힘들게 하는 점이다. 애초부터 ‘다른 길’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구상 없이는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영화 <남한산성>을 보는 동안 관객은 여러 번 감탄하게 된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영화에 더 몰입했다는 점도 귀한 성취다. 그야말로 사료-소설-영화의 삼각 꼭지점을 자유로이 오가면서도 영상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려던 이야기’를 유려하게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특유의 마치 성곽을 닮은 듯한 문어체마저 ‘입체’로 옮겨놓았으되 전달력도 살린 영화의 화법은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 ‘말(言)의 영화’였기에 말이 칼보다 무섭고 치열했다. 국운이 기울다 못해 혀끝이 칼끝보다 더 엄중했던 백척간두의 47일간을 고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