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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 - 닫힌 사회와 그 원흉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 중단 사태를 보며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극장에서 개봉된 지 이틀 만에 상영 중단을 맞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돌이켜 보면 2010년 3월 26일 일어난 천안함 침몰 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우리 국민 모두에게 사상검증의 리트머스 역할을 해왔다. 이 사건이 북한의 무력도발에 의한 소행이며 “폭침”이라는 정부 발표를 100% 신뢰하고 추호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는 합리와 이성을 떠나 즉각 신념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문제는 사상 검증의 리트머스로 환치돼 버린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와 대선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토론의 와중에서도 주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황당한 질문, “당신은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임을 인정합니까?”라는 말과 그에 대한 답변을 끈질기게 요구하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모름지기 토론이란 상대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가운데 어떤 논제에 대해 이성과 합리에 기초한 판단과 논박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 리트머스는 모든 것을 한 방에 무력화시키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현 정부의 장·차관 등 요직의 인사청문회에서도 후보자들을 검증하고 낙마시키는데 있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됐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예컨대 “나는 정부가 발표한 어떤 사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나름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일상생활 가운데 누구나 할 수 있고, 잘 받아들여지는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천안함 사건은 이러한 상식 너머에서 작동하는 예외이고 건드릴 수 없는 금기가 돼 있다.

이쯤에서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개봉과 상영 중단사태에 이르는 전개과정을 잠시 되짚어 보기로 한다. 상영시간 75분짜리, 비교적 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는 지난 4월,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됨으로써 대중에게 공개된 바 있었다. 당시 국방부의 관계자들이 이 영화를 두 차례에 걸쳐 관람하며 내용에 대해 리포트를 했으며, 국방부는 영화가 사실을 왜곡하고 당사자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가기관은 명예훼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에 따라 국방부는 사건 당시의 해군 관계자들과 유가족협회 측을 통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진행했다.

국방부가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주도한 것은 한 마디로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전검열’한 것으로, 정부 차원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겠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다름 없었다. 그러나 재판부가 9월 4일 이를 기각하면서 5일 정상적으로 개봉할 수 있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의혹 제기 자체를 막기보다는 허용하도록 하고 그에 대하여 투명하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도로 이 사건 영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판단은 너무나 지당하고 상식적인 것이어서 일반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 민주주의에 대한 건전한 상식을 갖춘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이와 같은 수준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도의 평이한 사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특정 국가기관이나 권력자들, 일부 언론이 이 문제에 관한 한 한마디로 도를 넘는 과민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과민함은 대체 어디서, 무엇 때문에 나오는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건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불안’이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아무 것도 감추는 것 없으며 법적·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안이 무엇이든, 국가기관이든 개인이든 불안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언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아무튼 영화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봉한 첫 이틀 동안 다양성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흥행을 예고했다. 메가박스는 당초 10여 개 스크린을 이 영화에 배정했다가 초반 흥행이 호조를 보이자 27개관으로 상영관을 늘렸으며, 주말 예매가 다수 이루어진 가운데 갑작스럽게 배급사인 아우라픽쳐스에 상영중단을 통보했다. 그로인해 영화 흥행은 좌초 위기를 맞게 됐다. 메가박스는 홈페이지에 올린 공지사항을 통해 “일부 단체의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로 인해 관람객 간 현장 충돌이 예상되어 일반관객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상영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사건을 일개 상영관 체인에서 벌어진,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못하겠다’는 일과성 해프닝이라 볼 수 있겠는가? 상영중단 이유가 무엇이건 이번 사건은 민주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것이어서 대외적으로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 돼버렸다.

한편, <천안함 프로젝트>의 경우와는 다른 사안 같지만, 김기덕 감독의 신작 <뫼비우스>의 경우도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사실상의 상영불가 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제한상영가’를 두 차례나 받았었다. 결국 문제가 되었던 장면을 2분 30초 정도 자진 삭제하고 세 번째 재심을 요청하여 ‘청소년관람불가(19금)’ 판정을 받고 개봉을 하였다. <천안함 프로젝트>가 정치적인 관점에서였다면, <뫼비우스>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각각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최근 우리 사회의 현주소, 현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금석 같은 기이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지난 9월 4일,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붙여져 가결됐다. 유효 289표 중 찬성 258, 반대 14, 기원 11, 무효 6표였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새누리당 김진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회 안에 최소한 31명의 종북세력이 들어와 있는 것이 확인됐다.” 기가 찰 노릇이다. 1950년의 조지프 매카시의 좀비가 지금 우리 국회에서 어슬렁거리는 형상이다.

지난 9월 9일, 고려대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고려대 학생회와 참여연대가 공동 주최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관련 강연회’는 학교 측의 장소 대관 거부로 무산 위기에 처했다가 결국 야외 광장에서 어렵게 열렸다. 행사 주최 측은 이러한 학교 당국의 비협조에 대해 ‘생각이 다른 견해의 표출을 차단하거나 방해하려는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했다. 역시 지난 9월 초, 경희대에서는 한 학생이 이 학교 교양대학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가르치는 강사를 국정원에 신고했다. 그 학생은 자랑스럽게도 자신이 신고한 내용을 캡처해 학교 관계자에게 이메일로 보내기까지 했다. 신고한 근거로는 선생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갖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에서 간부로 일한 전력을 적시했다고 한다.

이 모습이 현재의 시대정신인가? 지금 우리는 과연 민주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상식과 합리는 어디로 갔는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사태는 작금의 우리 사회를 엄습하고 있는 공안정국의 폐해를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사례들이 아닌가 싶어 비애를 느낀다. 정치·사회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종북주의자(종북좌빨)로 매도하는 신종 매카시즘은 정권을 넘어 착실히 계승돼 오고 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사회를 위축시켜 온 시대착오적이고 망국적인 사상논쟁은 지역감정보다 극렬하며 도를 넘은지 오래다.

이러한 사태의 이면에는 우리 국민 각자의 지적 수준이나 사리분별 능력을 현저히 낮게 평가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대중은 무지몽매하고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높은 분별력을 갖춘 자신들이 나서서 계도해야만 하며, 그들을 위험하고 추한 것들로부터 격리해서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들만 나라를 지켜왔고 불철주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해 온 사람들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파시즘 독재국가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이어왔고, 해방이후에도 교묘하게 청산의 칼날을 피해온 사람들, 지난 수십 년의 독재체제 아래서 기득권을 얻었고, 누려왔고, 지금도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입식 교육의 순진한 희생자들도 있다. 독재시대의 잔재, 우리 안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일상적 파시즘의 망령은 광기어린 일부 위정자들과 수구 언론의 확대재생산 속에서 이토록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갉아먹고 있다.

지금 우리는 ‘다른 것’은 용납되지 않고 곧바로 ‘틀린 것’으로 환치하여 이야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답을 말하지 않으면 오답이라는 오만과 독선을 깔고 있는 것이다. 독재시대로부터 면면히 계승돼 온 주입식, 객관식 교육에만 익숙해진 우리의 세태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으며, 그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복수극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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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