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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과연?

- 싱글파파들이 불러온 부성애 열풍

남자의 눈물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눈물이다.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 중 가장 각광받는 게 부성애 코드다. 영화와 드라마에 이어 예능 프로그램까지 모조리 휩쓸고 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 열풍은 제작자들에 의해 그리 꼼꼼히 준비되었다기 보다는 대중들이 만들어가는 현상으로 보인다. ‘기대작’이 아니었던 작품에서 의외의 대박이 터지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오직 아버지와 아이만의 관계
영화 ‘7번방의 선물’의 흥행과 KBS 주말극 ‘내 딸 서영이’의 선전, 방영과 동시에 다 꺼져가던 MBC 예능을 되살렸다는 평가까지 듣는 ‘일밤-아빠 어디가’의 성공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선 이후 ‘절반’의 힐링을 책임졌다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뜻밖의 흥행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분명 여태까지의 부성애 코드와는 다른 새로운 면모다. 물론 IMF 외환위기 직후에도 아버지 열풍이 분 적이 있다. 그런데 소설 ‘아버지’ 등으로 상징되는 이 부성애는, 긴 세월 어머니 뒤에 묻힌 채 돈 버는 것으로만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던 아버지의 존재감을 새삼 발견하는 식이었다. 유일한 임무였던 ‘돈 벌어오기’를 못하게 된 이후 가정 내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은 아버지들에게 ‘아빠, 힘내세요’라는 위로를 통해 다시 사회로의 원상복귀를 돕는 식이었달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 배분이라는 이분법이 경제 위기로 깨지면서, 그간 엄마를 통해서만 자식들과 소통해 왔던 아버지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이는 ‘경제 회복’으로 다시 아버지를 일터로 돌아가게 하면 예전의 조화롭던 이분법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직접적인 양육자가 아니었다. 소통은 어머니가 대부분을 전담했고, 어머니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아버지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엄마의 실종을 통해 엄마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새로 발견하게 되는 구조다. 요는 자식 입장에서, 부모는 양쪽 모두 엄존했다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든 어머니든 양쪽 모두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요즘 부성애 콘텐츠들은 오직 아버지와 아이만의 관계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엄마라는 존재가 애초부터 없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엄마가 없는 먼 곳으로 아빠와 아이가 여행을 떠나는 방식이다. ‘아빠 어디가’에 출연하는 아빠들은 그간 엄마의 남편이라는 지위만을 믿고 아이에게 소홀했던, 그래서 아이와 어떻게 놀아주고 대화해야 할지 모르는 아빠들이 많았다. 그런 아빠들이 아이와 둘만 마주앉은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 노릇을 하나둘 배워간다. 의도적으로 ‘싱글파파’ 상태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시청자들에게까지 일종의 ‘아버지 학교’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눈물보따리 제대로 터뜨린 ‘7번방의 선물’의 비결
영화 <7번방의 선물>은 기적 같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이다. 현재 120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니 그야말로 전 국민이 웬만하면 다 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40대 이상의 남성 관객이 흥행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영화 속 7번방의 ‘아버지들’에 해당하는 연령층 전체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극장에서 수많은 ‘아저씨들’을 만나게 된다. 가족들과 함께 왔거나 혹은 가족에게 이 영화를 보고 가겠다고 알리는 전화통화를 엿듣게 되는 기현상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 관객이 점점 느는 것 같다. 아버지라면 누구나 봐야 할 이야기, 아버지의 속내를 진정으로 어루만져줄 이야기라는 입소문까지 이 영화를 후원하고 있다.

순제작비 35억원의 ‘작은’ 영화가 올해 첫 천만 관객 달성은 물론 한국영화사의 흥행순위를 요동치게 하고 있다. 천만 돌파 당시의 순수익만 따져도 투자대비 19배라는 분석이 있었다. 이쯤 되면 제작사나 출연 배우들에게 있어 평생에 다시없을 대박이 아닐 수 없다.

이게 웬일인가. 사실 하나도 새롭지 않은 줄거리 아닌가? 이런 아버지, 드라마의 단골 캐릭터다. 그렇다면 류승룡이라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새로운 흥행킹으로 등장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용구는 사실 7번방에 관련된 무수한 ‘아버지들’ 중의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용구가 아니어도 예승이의 아버지 노릇을 해 준 사람은 많다. 실은 등장하는 그 수많은 아저씨들이 전부 예승이의 아버지 역할을 해냈다. 그 지극한 보살핌은 단지 용구와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고, 예승이가 장성해서 법조인이 될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철통같은 보살핌이다.

●‘엄마’는 처음부터 없었다
지적장애인 용구의 딸 예승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빠만 있었다. 엄마 얘기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식으로 용구에게 아이를 낳아준 것인지, 혹은 어느 버려진 아이를 용구가 데려다 키운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용구는 그 부족한 지능으로도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상태와 몸무게까지 정확히 읊조릴 뿐 아니라, 잊지 않으려고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챙기며 예승이와 관련된 그 모든 일이 거룩한 임무가 되어버린 딸바보 아버지로 살아왔다.

게다가 용구 자신도 아버지 없이 엄마하고만 살았다. 용구는 한쪽 부모 슬하에서만 자라다가, 그 어머니마저 다섯 살 때 잃은 고아였다. 딸 예승이는 처음부터 엄마의 기억이란 없이 아빠하고만 살아온 아이였다. 결과적으로는 1학년의 연말을 다 넘기지 못하고 아빠를 잃고 마는, 용구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슬픈 운명인 것이다.

예승이는 대신 이 세상의 수많은 좋은 아저씨들을 아버지로 얻게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천사보다 더 착한 마음씨와 행실로 주변 모든 남자들을 감화시킨 아버지 용구의 ‘선물’인 것이다. 자식 잃은 고통에 미쳐 날뛰던 경찰서장만이 자신의 딸에 대한 죄의식을 엉뚱한 증오로 변질시켰을 뿐이다. 권력에 취해 사람 잡는 권력으로만 생을 지탱하려던 서장은, 실상 끝내 부성애를 체득하지 못한 못난 아버지였다. 정진영이 맡은 교도소 감찰과장이 극한의 슬픔을 딛고 부성애를 배워가는 과정은 이와 대비돼 깊은 감동을 준다.

관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는 극장 안에서, 용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결핍이 심한 아버지에서 최고의 아버지로 거듭난다. 용구의 희생은 결과적으로 예승이에게 수많은 든든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들을 만들어주게 된다. 남자들끼리의 연대와 협력의 놀라운 감동을 일깨워준 용구를 위해, 그를 아꼈던 모든 남자들이 예승이의 보호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슬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용구가 살았다면, 예승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대와 협력이 일시적인 이벤트로 그친 후에, 가난한 지적장애인에 살인 혐의까지 받았던 아버지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무사히 딸을 키우고 공부시킬 수 있었을까? 설령 잘 키웠다 한들 이제는 돈 없으면 감히 꿈꿀 수도 없는 로스쿨에 딸을 입학시켜 변호사로 만들 수는 있는 것일까?

●내가 없으면, 내 아이는 누가
‘7번방의 선물’이 그토록 사람들을 울리는 이유는, 가슴 밑바닥의 불안감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세상에 남겨진 내 아이를 누가 지켜줄 것인가? 이혼율이 OECD 최고 수준인 이 나라에서 과연 배우자는 믿을 수 있을까? 직장은 언제까지 나를 써줄 것인가? 심지어 이제는, 누구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채 제 한 몸 지키기도 급급한 세상이 아닌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결혼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아이를 끝까지 내 힘으로 지키고 보호할 자신, 정말 없다.

‘레미제라블’의 판틴이나 장발장이나 ‘7번방의 선물’의 용구처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류애와 헌신으로 주변인들을 감화시켜 내 아이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라도 있다면 다행이겠다. 그 어느 것도 양육의 걱정을 덜어주지 않는다. 부성애 열풍의 이면에는 안전망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부모들의 특히 아버지들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불안감의 깊이가 흥행지표의 증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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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