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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화인들의 할리우드 본격 진출 현상을 주목하며’

바야흐로 우리 영화계가 유사 이래 가장 큰 호황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에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한 해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2편(<도둑들> 1,298만, <광해> 1,231만 명)이나 등장했고,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계의 해묵은 숙원을 마침내 이루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올해로 이어져, <7번방의 선물>이 벌써 천 만 관객을 넘어섰고, <베를린>, <신세계> 등이 연이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들의 할리우드를 비롯한 해외 진출, 그리고 그 결과들이 속속 국내 영화 팬들에게 선을 보이며 흥미를 더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영화인들의 할리우드에서의 활약은 의외로 일찍부터 있어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필립 안’씨가 1930년대 중반부터~70년대 초까지 할리우드 영화와 TV를 넘나들며 활약했었고, ‘오순택’씨 역시 1960~90년대까지 약 120편에 이르는 작품들에 출연을 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기에 출발해 현재까지 왕성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랜달 덕 김(Randall Duk Kim)’까지가 1세대라고 한다면, 영화 제작자이자 배우인 ‘필립 리’, ‘찰스 전’, ‘산드라 오’, ‘박호성’, ‘릭 윤’ 등, 재미교포 출신 2세대 젊은이들이 활약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들어 김윤진, 박중훈, 비(정지우), 이병헌, 배두나, 권상우 등 일련의 배우들이 속속 할리우드에 진출하면서 크고 작은 성과들을 내고 있다.

한국인으로 할리우드에 최초 진출한 연출자는 ‘정창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홍콩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홍콩에서의 영화명은 <천하제일권>)하였으며, 워너브라더스에 의해 배급되어 전미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세계적인 성공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창화 감독은 메이저 자본을 가지고 불세출의 액션스타 ‘이소룡’과도 작품을 하기로 계약이 돼 있었으나, 그의 갑작스런 요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후속 작품도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이후, 우리의 토종 연출자들이 할리우드에 입성해, 그곳 시스템의 지원과 자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일을 꿈꾸거나 도모하는 일은 난망으로 여겨져 왔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이후, 참신한 소재를 바탕으로 극적 완성도를 높여가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우리 영화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할리우드의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가시적인 모습은 우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의 리메이크 판권을 대거 사들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사망한 박철수 감독의 <301 302>(1995)를 필두로, <시월애>, <엽기적인 그녀>, <달마야 놀자>, <가문의 영광>, <선생 김봉두>, <광복절특사>, <조폭마누라>, <친절한 금자씨>, <세븐 데이즈>, <중독>, <장화, 홍련>, <괴물>, <거울 속으로>, <김씨 표류기>, <아저씨>, <런닝맨>, <추격자>, <폰> 등, 30여 편에 이르는 우리 영화들이 20만~100만 달러 정도의 저작권료를 받고 리메이크 판권을 넘겨주었다. 할리우드의 제작자들로서는 이른바 껌값으로 괜찮은 이야기꺼리를 확보해 둔다는 것이고, 우리 영화계로서도 나쁠 것은 없는 거래인 셈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어 개봉한 영화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며, 그나마 흥행 성적도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용가리>를 만들며 노하우를 축적한 심형래 감독이 할리우드에 진출해 본격 괴수영화 <디워>를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애국심을 앞세운 노이즈마케팅에 힘입어 850만 관객몰이를 했으나, 미국 현지 흥행은 1천만 달러를 약간 넘는 정도여서 마케팅 비용도 건지지 못하고 참패했다. 그의 뒤를 이어 할리우드를 노크한 감독은 ‘강제규’였다. 그는 <마이 웨이>를 가지고 할리우드를 노크했고, 파라마운트에서 3,500~4,0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제작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주 타깃으로 흥행 전략을 꾸렸다.

그러나 이후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감독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시나리오를 고친다는 이유로 파라마운트가 손을 거둬버리는 바람에 국내 펀드(약 280억)만으로 국내용 영화 제작에 나섰다가 흥행에 참패하고 파산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토록 잔혹한 도전기에 이어 최근 우리 감독들의 할리우드표 형화들이 속속 극장에 걸려 대중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의 <라스트 스탠드>가 지난 2월 21일 개봉을 했고,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가 2월 28일 개봉,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5월 개봉을 목표로 작업 중에 있다.

이제 우리 젊은 인력들의 할리우드 진출은 결코 우연이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전후맥락으로 볼 때 필연이 돼가고 있다. 현재 드림웍스, ILM, 오퍼니지, 디즈니·픽사 등, 할리우드 유수의 업체들에 재미교포 1.5세, 2세를 제외하고도 우리 한국인 전문 인력, CGI와 특수효과 영상제작, 애니메이션 등 여러 분야 스텝들이 20~30명씩 포진하고 있다. 향후 이러한 영역에도 더 많은 인력의 진출이 가속화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우리 영화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할리우드가 1920년대 이전부터 구축해 놓은 철저한 분업 시스템에 대한 이해이다. 간단히 말하면 돈 놓고 돈 먹기를 위해 능률을 극대화·최적화 한 시스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감독이 아이디어 발상부터 시나리오 개발, 최종 편집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고수하지만, 할리우드에서 감독은 일반적으로 프로덕션 부분만 책임지면 된다. 그리고 영화의 최종 편집권도 감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로듀서(제작사 대표)가 갖는다. 예컨대 지난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를 이끌었던 감독들이 표현의 자유를 찾아 1930년대 초반에 미국으로 대거 이주했던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추구하는 제작 관행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특히 작품의 최종 편집권을 감독이 갖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며 주변부만 맴돌았다. 그 결과 1930년대 할리우드 B급 진영에서 활약하며 마이너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공포, SF, 판타지 계열의 영화들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도 유럽과 제3세계 출신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잘 적응하지 못했던 사례는 너무나 많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그들도 납득할 수 있는 우리만의 유용한 관행이나 방식이 있다면, 그것을 착근시킬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할리우드는 지금도 전 세계 각국에서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이야기꺼리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판권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마치 블랙홀과 같다. 할리우드는 지금까지 100년 넘는 역사적 과정을 통과해 오면서 언제든지 매너리즘에 빠지고 활력이 둔화된다 싶으면 제3세계에서 돌파구를 찾아왔고, 신선한 피를 수혈 받으면서 나날이 젊음을 더해가고 있다. 우리 영화인들의 진출은 이제 시작단계이고, 참여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향후 급속히 확장돼 나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영화인들의 활발한 진출은 소재 빈곤에 시달리는 할리우드에 새로운 영감과 감수성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작은 성과에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 전략적으로, 지혜롭게 할리우드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윈윈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 영화계도 내수시장 중심의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인 산업구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해외 시장으로 뛰쳐나가야 하는데, 그 교두보로서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은 너무나 중요하다. 할리우드의 배급 시스템을 활용한 전 세계 시장 공략은 너무나 중요한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급 인적자원들이 불굴의 도전정신을 가지고 큰물로 나아가 멋지게 활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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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