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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혁명과 대학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변화

“SNS 중심의 새로운 소통 구조 안착”

바야흐로 SNS의 시대이다. 2000년대 이후 미니홈피와 블로그 열풍을 지나 이제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 중심으로 새로운 소통 구조가 안착했다. 특히 이러한 소통 방식은 주로 20대 청년세대, 즉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대학문화의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불법유인물’의 시대였다. 대학가에 공개적으로 대자보를 붙이는 것도 쉽지 않던 그야말로 암흑과 같던 시절이었다. 공적 담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어두운 지하실과 같은 곳에서 인쇄한 문건을 몇몇 지인들끼리 은밀하게 돌려 읽는 식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현실 도피와 같은 허구적인 낭만을 주요 화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라는 표현으로 1970년대를 대변할 수 있다. 그야말로 권력의 일방적인 목소리만 울려퍼지던 시절이었다.

그 후 1980년대가 되면서 대학가는 저항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학 공간은 사회 공간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물론 국가보안법이나 학원사찰과 같은 감시와 처벌의 구조는 그대로였지만 대학공간은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받음으로써 의사 표현을 할 수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유인물’과 ‘대자보’였다. 대학생들은 언론보다는 대자보를 통해 중요한 소식과 속보를 접했다. 아침마다 학생회에서 배포하는 유인물은 학생운동권과 일반 학생들을 매개하는 매우 중요한 소통매체였다.

그것들은 방송이나 신문 등 공적 담론의 생산 매체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진실을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대 대학의 학생운동과 대학문화를 이끌어가는 데 ‘대자보’는 엄청나게 중요한 매체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하위문화는 1980년대 후반 잡지 <말>의 창간이나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가의 대자보는 ‘말(言)’이 사라진 시대에 그나마 ‘말’을 지켜낸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억눌려 있던 소통에 대한 욕구와 문화산업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대중매체의 급격한 확산으로 이어졌다. 또한 대중문화를 자신의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신세대의 등장과 케이블TV의 확장도 주요한 배경이었다.

이후 등장한 PC 통신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소통 혁명으로 인해 대학문화와 대학생들의 삶 역시 변화를 겪게 된다. PC 통신이 대중화되면서 오프라인의 만남과 소통 방식이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PC통신에는 각 대학별 공간이 개설되면서 사회적 의제나 담론이 아니라 학교 중심으로 담론 주제가 변질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 결과 학교와 학교 사이에 비교와 경쟁, 상호비방, 순위경쟁 등이 PC 통신 등 온라인 공간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데, 이러한 모습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다. 소위 ‘대학 훌리건’이라 불리는데, 자기 학교에 대한 무한사랑을 바탕으로 다른 학교와 학생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고, 나아가 공격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PC 통신 이후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은 점점 확산되고 일반화되었다. 초창기에는 개인적인 공간의 이용보다는 오프라인 활동이나 PC 통신의 동호회 활동이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클럽이나 카페 등이 학교동문회나 동아리, 취미집단 등 동호회를 중심으로 인터넷공간이 분할되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새로운 공간으로 변화한 것이 ‘싸이월드’의 등장이다. 싸이월드는 동문회나 동호회 중심의 온라인 공간을 개인 중심의 사적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적 공간은 개인의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접속과 소통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PC 통신이나 인터넷은 익명성이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이라고 받아들이던 시기였음에도 ‘실명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1990년대 초반 PC 통신 이후 익명성에 익숙하던 이들에게 실명제는 새로운 호기심의 영역이었으며,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한국문화에는 충격적이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미니홈피 열풍은 시들해졌다. 그 사이 등장한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단어를 지금처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던가. 이러한 SNS 테크놀로지는 20세기를 지배하던 ‘매스 미디어(mass media)’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로의 새로운 진화를 일구고 있다.

두 미디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들이 있다. 우선, 생산자와 수용자의 관계이다. 대중매체와 대중의 관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수와 다수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 관계는 경우에 따라서는 무한증식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관계는 과거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게 된다. 그 관계는 ‘친구’ 혹은 ‘팔로워’라는 형식을 띠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하는 사람들만 선택할 수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정보만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SNS 공간에만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긍정과 낙관이 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듣고 싶은 내용들만 골라서 전달해주기 때문에,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 듯한 착시 현상을 겪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이 충돌하고, 경쟁하고, 권력을 행사한다. 지난 19대 총선은 SNS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두고 ‘이제 진보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떠나 인간관계를 넓혀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자신이 원하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들만 들을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SNS 혁명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것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처럼 공적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에 비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대학사회만 하더라도 과거와는 달리 세련되고 쾌적한 공간으로 변모한 것은 사실이다.

건물벽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던 대자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학생처 직인이 찍혀 있는 깔끔한 선전물만 정해진 공간에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다. 정작 학생들은 더 이상 대자보나 오프라인 게시판을 많이 활용하지 않는다. 학사관련 정보는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 들어있고, 기타 관련 소식도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받는다.

하지만 정작 대학사회는 심각한 소통부재를 겪고 있다. 정작 자신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며, 나아가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감각에 익숙해져 있다.

대학 공간에서 비판적 목소리는 세련된 제도와 규정으로 인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이미 그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대학생들은 ‘진심으로’ 학교측의 제재에 동의한다. 목표는 쾌적하고 깔끔한 대학 공간일 뿐이다. SNS는 대학생들의 삶에서 나와 사회, 구체적인 현실과 온라인 공간의 심각한 분리를 경험하게 했다. 그 결과는 깊이 있는 성찰과 긴 호흡의 분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그것은 SNS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주목할 것은 대학생, 즉 청춘의 삶이다. 오늘날 청춘은 최악의 삶으로 치닫고 있다. 대학생활을 견딘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졸업 이후의 실업과 비정규직, 결혼, 육아, 명퇴, 노후 등 삶의 모든 궤적에서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이 과연 현실을 바꾸는 혁명적 도구가 될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 혹은 현실을 망각하는 도구로 그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SNS는 혁명적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성능과 가치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중립적이다. 문제는 그것을 이용하는 ‘유저(user)’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SNS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유저, 즉 주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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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