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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코미디의 위기, TV는 웃고 코미디언은 운다

코미디언들에게 지상의 모든 직업 중 가장 큰 자유를 주어야…

1. 고사의 위기에 처한 TV 코미디
코미디언들이 웃음을 잃었다. 올해로 50년 역사를 맞이하게 된 한국 TV 코미디가 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고사(枯死)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난 2009년 10월, 성남시에서 제1회 대한민국 희극인의 날 행사가 벌어졌다. 수십 년 간 온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해온 코미디언들이 스스로의 자긍심을 북돋우기 위한 축제를 펼친 것이다. 배삼룡, 구봉서, 송해 등 원로 코미디언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일선 코미디 PD와 연기자들을 시상하며 코미디언들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1년 뒤인 2010년 10월 제2회 희극인의 날 행사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아쉬움 못지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SBS의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종영된 것이다. 그해 5월 MBC가 시청률 저조 등의 이유로 <하땅사>를 폐지했기 때문에, 방송 3사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서 KBS 2TV <개그콘서트>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2010년 연말 방송사의 시상식에서도 코미디의 위기는 그대로 드러났다.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개그맨들이 수상의 영광을 누렸지만, 본격 코미디 활동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MBC 연예대상을 받은 유재석은 “내년에는 더 많은 후배들과 함께 했으면 한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KBS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김병만은 “MBC SBS 사장님들, 코미디에 투자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MBC의 코미디 부문 상은 시트콤 출연자들의 독차지가 되었고, 신인상 후보에 오른 개그맨조차 없었다.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SBS는 아예 코미디 부문상을 없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06~2007년 <개그콘서트> <웃찾사>는 20%대의 시청률로 방송가를 장악했고, <개그야>의 선전으로 방송 3사가 코미디 대전쟁을 벌였다. 인기 연예인들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기 위해 로비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2009년 <개그야>가 짧은 전성기 끝에 사라졌고, <웃찾사> 역시 5%가 안 되는 시청률을 이어가다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도대체 한국 TV 코미디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2. 한국 TV 코미디의 변천사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한국 TV 코미디의 역사는 시작된다. 당시에는 유랑극단, 극장, 미8군 쇼의 무대를 그대로 화면으로 옮겨온 경우가 많았다. 가수와 악단이 함께하는 쇼에서 사회자나 코미디언들이 슬랩스틱이나 촌극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형식이었다. 본격적인 TV 코미디가 시작된 것은 1969년 MBC의 개국과 함께 시작된 <웃으면 복이 와요>로 볼 수 있다. 이때의 코미디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유명 코미디언들 위주의 쇼였다. 홀쭉이와 뚱뚱이(양석천과 양훈), 막둥이(구봉서), 비실이(배삼룡) 등은 등장하기만 해도 사람들을 웃겨댔다. 그 이전의 원맨쇼와는 성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코미디언 개개인의 역량과 스타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코미디가 보다 조직화되고 구성의 묘미를 살리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3년 첫 전파를 탄 <유머 일번지>에서부터 드라마와 코미디가 결합된 시츄에이션 코미디가 본격화된다. ‘변방의 북소리’, ‘괜찮아유’, ‘북청 물장수’ 등의 고정 포맷이 존재하고, 거기에 코미디언들이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며 약간의 드라마와 캐릭터 개그, 슬랩스틱 등을 곁들이는 방식이다.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처럼 시사적인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며 권력자를 비판하는 코너까지 등장해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룬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쇼 비디오자키>로 이어진다. 전문 코미디 작가의 대본, 무대 장치와 음악 같은 여러 요소들을 입체적으로 배치하는 시도들도 꾸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대는 SBS가 개국하면서 신진 개그맨들이 시트콤 형식의 코미디보다는 음악, 퀴즈, 게임 등이 결합된 쇼에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TV 코미디의 중심도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버라이어티 쇼로 옮겨가고 있던 때였다. 바로 이 시점에 기적과도 같이 <개그 콘서트>가 등장했다. 1999년 대학로에서 이루어지던 공개 코미디 쇼의 무대를 TV로 옮겨왔고, 이것이 대반전을 가져온 것이다. 한 코너의 진행 시간을 굉장히 짧게 만들고, 같은 코너에서도 각 연기자들이 다양한 구성으로 치고 들어오면서 매우 감각적인 구성을 만들어냈다. 대학로 무대에서 관객들과 교감한 내용들을 그대로 반영시켰고, 관객이 참여하는 코너들도 과감히 끼워넣었다.

KBS의 <개그 콘서트>가 ‘봉숭아 학당’ 등의 코너로 다채로운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가운데, SBS의 <웃찾사>는 보다 젊은 시청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나몰라 패밀리’ 등 노래와 춤이 함께하는 구성들도 차별성을 가져다주었고, <개그콘서트>와의 경쟁 체제도 서로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어 2006년 MBC의 <개그야>가 ‘사모님’ ‘별을 쏘다’ 등을 통해 인기를 모으는 가운데 한국 TV 코미디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섣부른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불과 4~5년 뒤에 최악의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다.3. 코미디 위기, 내외의 문제들과 현재
코미디는 저급하다는 인식과 그로 인한 억압은 오랫동안 한국 방송가를 떠나지 않고 있다. 1975년 정부는 코미디가 ‘저질’이라는 이유로 방송을 전면 금지시켰다. 본인이나 상대를 희화화하면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는 곧 각계의 반발을 받게 되고, 2주 만에 철회하게 된다. 당시 코미디가 자기 비하나 슬랩스틱 위주로 이루어진 원인은 사실 정부 자체에 있었다.

웃음이란 원래 강력한 권위를 비틀고 상식을 위반하고 조롱하면서 해방감을 얻는 것이다. 당연히 정치인과 지배층을 풍자하는 것이 코미디의 가장 주요한 소재이다. 그러나 강력한 권위주의 정치로 인해 코미디의 손발을 묶어놓았으니, 결국 코미디언들은 외모를 헐뜯는 등의 즉물적인 소재를 택하고 대중이 그 자극에 둔감해지니 더 과격한 양태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한국 코미디가 정치나 시사적인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게 된 것은 1987년의 민주화 운동이후부터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킬 수 있게 되었고,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등의 코너가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시사 코미디의 역사는 제 줄기를 뻗어나가지 못했다.

2천년대에 이르러 <개그콘서트>를 비롯한 공개 코미디가 패션, 음악, 댄스 등 감각적인 장치들을 통해 젊은 대중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극’들은 코미디 쇼의 대상들을 젊고 적극적인 시청자 층으로 좁혔다. 그런데 이러한 타게팅이 곧 자기 발목을 잡게 된다. 인터넷과 케이블 TV의 보급으로 젊은 시청자들은 지상파 TV 외에서도 다양한 유머와 코미디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분명한 사실은 코미디언은 웃음을 잃었지만, TV는 여전히 웃음으로 넘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 대상을 휩쓸고 있는 MC들은 개그맨 출신들이고, 그들은 버라이어티 쇼를 통해 다채로운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개그맨들도 힘겹게 아이디어를 짜기보다는 애드립과 재치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버라이어티 쇼로 진출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가수, 탤런트, 심지어 아나운서들까지 코미디언화되고 있다.

4. 한국 코미디의 생존술
<개그콘서트>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물론 최전성기만큼 빛나고 있는 건 아니다. 우수한 코미디언들이 속속 쇼를 빠져나가는 어려움도 겪고 있다. 그러나 고정된 시간대에 내실 있는 제작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신구가 조화를 이룬 연기자들의 안정감이 꾸준히 히트 코너를 만들어낸다. 대중들은 버라이어티 쇼, 토크 쇼, 유사 리얼리티 쇼에서 웃음을 얻고 있지만, 정통 코미디가 주는 진한 웃음에 대한 갈증은 항상 느끼고 있다.

방송 3사는 코미디 부활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시청률에 목숨을 걸면서, 정통 개그맨보다는 아이돌 가수나 유명인들을 출연시키는 어중간한 포맷을 내보인다. 반짝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결국 버라이어티 쇼에 나오는 꽁트와 차별을 보이지 못한다. 더구나 구색 갖추기 식의 심야 시간대의 편성은 케이블 TV와의 경쟁을 이겨내기 어렵다. 어쩌면 최근 가장 큰 이슈를 모으고 있는 코미디는 이다. 프로그램 자체를 패러디화해서 마니아적인 감성을 가진 젊은 층으로부터 큰 웃음을 얻어내고 있다. 정통 코미디의 포맷을 벗어나는 실험도 생존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럼에도 오직 ‘웃음’에 집중하는 정통 코미디는 존재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소재의 한계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특정 정치인을 직접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되고,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건드려서도 안되고, 특정 집단을 불쾌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강압은 결국 우리 코미디를 장애에 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모든 직업 중에 가장 큰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게 코미디언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색해하고 어려워하는 것들을 ‘웃음’의 힘을 빌어 밖으로 드러내고, 그를 통해 억눌린 감정을 해소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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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