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3.2℃
  • 맑음강릉 5.0℃
  • 구름조금서울 3.0℃
  • 구름조금대전 4.5℃
  • 맑음대구 5.4℃
  • 맑음울산 5.8℃
  • 구름조금광주 7.2℃
  • 맑음부산 7.2℃
  • 구름많음고창 6.1℃
  • 구름조금제주 7.8℃
  • 구름조금강화 2.6℃
  • 구름많음보은 4.3℃
  • 구름많음금산 3.3℃
  • 맑음강진군 7.8℃
  • 맑음경주시 6.1℃
  • 맑음거제 6.7℃
기상청 제공

문화유산의 보존 VS 문화유산의 훼손

문화유산은 우리의 일부, 지구의 일부

수년 전부터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문화재 보존의 가능성과 문화재 훼손을 방지할 수 있는 지를 자주 질문 받곤 한다. 그럴 때는 대수롭지 않게 ‘가능하죠’라는 틀에 박힌 간편한 답변을 내뱉으면서 그 자리를 슬쩍 피한 적도 있지만 내심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내 자신조차도 요즘 들어 반신반의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유행어인 지속가능성을 장식어로 덧붙여 뭔가 그럴듯한 지속가능한 문화재 보존과 문화재 훼손 방지책을 주장하는 경우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대로는 문화재 보존은 불가능하고 자칫 잘 못하면 문화재 훼손을 오히려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세간에서 말하는 소통이 없다면 말이다.

우리나라는 1961년 문화재보호법이 탄생하면서 문화재에 관한 국가적 관리체계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서구의 선진국들이 19세기 후반에 근대국가를 형성하면서 문화재보호에 대한 국가적 법률적 관리체계를 구축한 배경에서 일맥상통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라는 어두운 역사적 경험을 통해 문화재라는 개념이 비록 일본을 통해 도입됐지만 점차적으로 한국적 상황에 맞는 관리체계와 법률체계를 구축해나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당시의 국가중심, 국가이념에 기반한 문화정책을 펼치면서 문화재는 소통의 대상이 아닌 선전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른바 소통 부재의 시대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외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이것은 초창기에 겪어야하는 문화재의 숙명적인 속성이기도하다. 이 시기에 문화재는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일컫는 말로서 전문가집단이 보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경직되어 버리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문화재의 가치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인식하기보다는 행정가와 전문가들끼리의 합의를 통해 가치를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가치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즉 문화재가 지닌 잠재적 가치를 활용하기보다는, 문화재를 보호한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원형보존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러한 태도는 더욱더 힘을 얻게 된다.

그런데 원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에 원형은 존재하는 것일까? 삼라만상이 다 변하는데 불변하는 것은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원형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원형을 새롭게 만들고 있진 않는가? 라는 기본적인 철학적 의문을 가지게 되지만 이에 대한 사유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결국 무엇을 어떻게 보존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을 회피하면서 구태의연하게 문화재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문화재청이 편의상 조장하여 방관한 것에 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재보호법에서 문화재의 정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아마도 문화재라는 용어가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시대착오적임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우는 데에는 남다른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가 성숙해지면서 문화재라는 용어보다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 문화유산이라는 용어가 자주 대중매체에 등장하면서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문화유산에는 과거에서 미래로 전달하는 대상이 있고, 전달하는 여러 사람들이 그 개념 안에 존재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소통이 그 중심에 서게 된다. 결국 문화재가 역사적 가치, 예술적 가치, 학술적 가치에 편향되었다고 한다면 문화유산은 그것들을 포용하면서 사회적 가치, 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시민사회에 접근하고 있어 창의적인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문화유산의 다양한 가치를 사회적,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기존과는 다르게 여러 조직의 행정가, 여러 분야의 전문가, 이해당사자들의 협조와 노력이 필요하고 시민들의 관심이 절대적이다. 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합의하려면 직업의 윤리성을 바탕에 둔 소통이 요구되지만 누구나 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풍토에서는 직업의 전문성을 높이는데 주력하지만 직업의 윤리와 가치관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유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직업의 윤리성 없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서로의 신뢰를 위태롭게 하고 개인의 이해에 따라 좌우되어 결국 소통이 아닌 불통으로 전락할 우려를 낳는다. 이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문화재청의 의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려놓고 있다. 결국 문화재청이 이러한 윤리적, 철학적 사유 없이 문화유산 행정을 구태의연하게 펼친다면, 그리고 창의적 소통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문화유산 정책은 발전보다는 퇴보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한편 엊그제만 하더라도 우리 곁에 있었던 건축문화유산과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예술품들이 갑작스런 자연재해 혹은 인위적 재해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우리 눈앞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최근 시리아 정세의 불안과 터키의 지진으로 인한 문화유산의 파괴에 관련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숭례문의 화재현장이 생중계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일본의 스나미 피해를 안방에서 그대로 볼 수 있는 세계화 속에 우리들은 살고 있다.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밤사이에 안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이 시각 지구 어디에선가는 재해로 인해 문화유산이 훼손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세계적인 규모를 지니게 되면서 세계 시민적 사고가 필요하게 되었다. 자국뿐만 아니라 이젠 세계를 걱정하게 되었다. 세계의 문화유산을 걱정하게 되었다. 세계와의 소통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럼 우리는 왜 이러한 문화유산을 수많은 위협 속에서 지키려고 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 하나, 여러 가치들 중에서 문화유산은 우리의 기억의 일부이며 지구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기억은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기 드라마처럼 사랑하는 여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 같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에서 무관심은 바로 사회적 죽음,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회와 같다. 과거를 잃는 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잃는다는 것,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과거를 소유한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도 함께 소유한다는 말이다.

평상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문화유산에 무슨 일이 생기면 대중매체의 특종사냥처럼 너나할 것 없이 관심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무턱대고 반길만한 일은 아니다. 과열된 관심은 오히려 문화유산의 보존에 악영향을 초래한다. 과열된 관심 속에 남는 것은 식은 후의 공허함과 같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말초신경을 자극함으로써 대중매체는 이 기회를 삼아 자신들의 위상을 더 높이려 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문화유산은 더 훼손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이 우선시 되기보다는 소모적이고 즉흥적인 조치에 몰두한 나머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접근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가치의 발견과 인식을 통해 문화유산이 세상에 노출되는 만큼 그 취약성은 피할 수 없다. 문화유산 자체의 취약성도 있지만 사회적 환경의 변화, 특히 문화유산의 과도한 관광화, 무분별한 활용으로 인해 훼손에 직면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같은 문화유산의 취약성은 사전에 줄일 수 있다. 문화유산이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는 것을 명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사회가 노약자와 장애인들을 배려하듯이 문화유산을 평상시에도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사회적 보장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일을 문화재청의 몫으로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겪고 있는 여러 훼손 사례들은 서구사회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똑같은 고민이며, 세계적 공통 현상이다. 외국의 문화재전문가들과 모여 문화재 훼손 방지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마치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점은 서구사회는 보존의 생각과 방법론을 이미 다양하게 발전시켰기 때문에 문화유산의 다양한 보호조치가 사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지역사회의 소통을 바탕에 깔고 있다.

문화유산의 보존방법론의 창의성 없이는 다변해가는 사회의 이해·요구·기대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문화유산이 창의적인 인간의 창조물이라면 그것을 지키는 데에도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창의성 없는 지속가능성은 있을 수 없고 인식의 확대와 소통 없는 문화유산의 가치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문화유산의 잠재적 가치를 훼손하고 퇴보를 초래할 것이다.

최근에 발생한 한 사례를 보면서 두서없는 이 문장을 끝맺고자 한다. 명동성당을 재개발 하던 중 구한말 근대 배수관로가 드러나 공사가 중단된 가운데 시공 건설업체가 굴착기를 동원해 옛 주교관 등 유적 일대를 불법으로 훼손한 것이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져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문화재의 의도적 훼손이 빈번히 자행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개발업체의 과실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유구의 보존 방법론에 관한 생각의 부재, 소통의 부재가 깔려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재개발 예정지에 유구가 나타나기만 하면 대어를 낚았다고 생각하는 반대시민운동가, 불투명한 의사결정과정, 유구의 가치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의 윤리성 부족, 종교의 사회적 역할 등을 따질 수 있겠지만 이러한 사업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우리사회의 부조리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문화유산을 보면 그 시대의 자화상이 보인다고.

관련기사





[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