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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을, 노란 불빛의 서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다. 하늘이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파랗게 돋아오르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 아무래도 가을은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기보다는 놀러가기에 더 좋은 계절이다. 실제로 서점업계에서는 가을보다 여름에 책이 15% 정도 더 잘 팔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을은 책 읽기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다. 한잎 두잎 마른 잎을 떨어내는 나무를 보며 사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올 한 해도 출판계는 외로운 사람, 뭔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 심심한 사람들에게 위안과 지식, 재미를 줄 책을 펴내며 자박자박 걸어왔다. 오늘도 사람들은 뭔가를 찾아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서점으로 향한다. 따스한 불빛 아래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 책에서 희망과 위로를 찾다
2009년 한 해 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책의 키워드는 ‘희망’과 ‘위로’, ‘중년 남성’ 그리고 ‘스타’다.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전직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에 정국은 불안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대가 어두울수록 책 속에서 희망을 찾고, 위로를 얻고자 했다.

특히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기고 간 희망의 메시지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1994년 출간됐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는 출간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 후 노무현 다시읽기 열풍을 일으키며 큰 사랑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인 ‘성공과 좌절’ 역시 지난달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고 장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암투병 중에도 생을 긍정한 화가 김점선의 자서전 ‘점선뎐’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머물렀다.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한 심리학 서적도 인기를 끌었다. 출간된 지 2년이 다 되어감에도 여전히 교보문고 선정 상반기 베스트셀러에 랭킹된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를 비롯해 심리학 이야기를 담은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들 책의 공통점은 심리학에 관해 알려준다기보다는 그 심리학으로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위로’라는 키워드는 책의 주소비자층으로 떠오른 중년 남성과도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 올해에는 부쩍 중년 남성층이 책을 많이 사봤다. 주로 중년 남성이 잘 구매하는 자기개발서가 선전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유정아)의 주요 독자층은 소통에 목말라했던 30, 40대 남성이었다. 중년 남성의 책읽기는 에세이 분야에서도 두드러졌다. 의무에 눌려 살아가는 한국의 중년 남자들을 각성시킨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스타의 힘은 책에서도 강했다. 인지도가 높고 작품성도 뛰어난 스타작가의 강세는 여전하면서도 놀라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1Q84’는 하반기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지난달 100만부의 판매고를 돌파했다. 공지영의 ‘도가니’,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도 인기를 끌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도 마찬가지다.

한편, 또다른 의미의 ‘스타’작가들이 출판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예전에도 연예인이 책을 출간하던 일은 많았지만 올해는 연예인들의 책이 단지 스타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한 홍보용이 아니라 각각 특화된 전문적인 내용을 다뤘다는 점이 주목할 만했다. 단지 연예인이 책을 낸다고 해서 잘 팔리리라 예상하는 것은 이제 옛날 말이다. 한국방문의 해 홍보대사 배용준이 한국의 장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한국문화를 전수받은 경험을 오롯이 담은 책인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직접 살을 100kg까지 찌웠다가 다이어트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훈의 뱃살빼기 대작전’, 인생 컨설팅이라는 측면에서 자기개발서 콘셉트로 접근한 ‘세상에 너를 소리쳐’ 등은 이제 스타들의 책만들기가 일정한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들 책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라는 비판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책이 단지 스타의 이름을 내세우는 점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독자들이 책에서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짚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 책 안 읽는 대한민국, 독서의 즐거움은 강요 아닌 체득으로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독서실태에 따르면 한국 성인 10명 중 7명은 1년에 책을 평균 한 권 읽는다. 나머지 3명은 한 권도 읽지 않는다.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책 안 읽는’ 대한민국 독자들은 그래서 서점을 찾았을 때 더욱 베스트셀러만을 선택하는 쏠림현상을 보인다. 뭔가 책을 읽기는 읽어야 하는데 그나마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책이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출판계가 더욱 ‘팔릴만한 책’에 안전하게 투자하게 하고, 이는 곧 ‘다양성의 실종’이라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 일단 유명해진 책은 수십, 수백만 부 판매를 돌파하지만, 출판계의 대략적인 손익분기점이 되는 1000부도 팔지 못한 채 사장되는 인문교양서적이 수두룩하다. 좀더 다양한 책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그에 따라 책 시장의 꼬리가 통통해짐으로써 콘텐츠가 풍부해지는 선순환이 아쉬운 이유다. (‘롱테일의 법칙’에 의하면, 아주 많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다양한 상품이 조금씩 여러 개 팔림으로써 이들이 매출 그래프의 통통한 꼬리를 차지한다. 이는 전체 매출의 신장을 크게 돕는다.)

도서관 등 공공기관에 투자되는 도서구입비도 턱없이 낮고, 책을 서점해서 직접 사 읽는 사람의 수도 적다. 신문을 제외하면 좋은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도 제한돼 있다. 그러나 “책을 구입해놓아도 찾아 읽는 사람이 없다”는 도서관 사서의 증언은 인프라의 부족이 단지 낮은 독서율의 원인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책을 비롯한 모든 문화는 저절로, 발걸음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을 질타하고 캠페인을 벌일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국민들이 자연스레 책 읽기의 즐거움을 습득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참고서와 문제집이 웬만한 베스트셀러보다 더 잘 팔리는 현실, 학생들이 책 읽을 시간이 없어 결국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를 놓친다는 점 등은 결국 교육, 문화계 전반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 전자책이라는 그릇, 결국은 콘텐츠가 문제다
한편, 최근 출판계에서는 전자책 단말기 '킨들'이 핫이슈로 떠올랐다. 아마존은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 무선으로 e-북을 받아볼 수 있는 신형 킨들을 곧 출시할 예정이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책을 바로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콘텐츠를 담는 그릇의 변화라는 점에서 출판계 역시 전자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릇이 변하면 내용물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전자책이 상용화되면 책을 기획할 때 ‘내로우 마케팅’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종이로 인쇄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고, 독자층이 다양하게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이 관심을 기울일만한 출판물을 만듣는 일이 더 쉬워지고 중요해질 것이라는 얘기다. 호흡이 짧은 책을 여럿으로 나누어 판매하는 일도 가능하다. 필요한 부분만 다운로드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최근 김훈, 신경숙, 전경린 등 거물급 작가들이 인터넷에서 소설연재를 하는 일도 출판계가 새로운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콘텐츠의 문제다. 결국 질 좋은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는 사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책은 오래 전부터 가장 휴대성이 좋은 매체 중 하나였다. 가벼운 페이퍼백 한 권을 사면 어떤 별도의 장비도 필요 없이 가방에 쓱 넣고 다니다 펼쳐 읽기만 하면 된다. 눈에 편안한 전자책이 나오고, 종이의 질감을 살린 전자종이의 출시도 고무적이지만 만 원 안팎의 책을 사보는 것에 비하면 가격 대비 효용성이 아직 낮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다 해서 오래된 매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욱 특화될 뿐이다. 결국 출판계는 더 나은 콘텐츠, 사람들이 원하는 책이 어떤 것이냐는 오래된 질문에 끝까지 천착해야 하는 것이다.

프로슈머라는 개념이 한때 화제가 됐다. 책 역시 마찬가지다. 책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간다. 깊어가는 가을, 독자가 어떤 책을 선택하고, 어떤 서평을 주고받으며 무슨 담론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책에 담길 내용 역시 달라질 것이다. 작가들과 출판계는 그 다감한 교류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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