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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패왕별희(覇王別姬)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이 경극을 어설프게 흉내내어 왕과 관객의 웃음보를 터뜨리게 한다. 한국인에게 경극이 완전히 생소한 문화였다면 이 경극의 패러디 장면을 보고 그렇게 웃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경극이 가까워진 것은 전적으로 영화 ‘패왕별희’ 덕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왕별희는 한국에 소개된 많은 중국 영화 가운데 그저 그런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한국인의 문화적 지평을 넓혀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인 데이와 샤오루의 인생 궤적을 따라간다. 1924년 데이는 어린 시절 북경의 경극학교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배우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같은 훈련생인 샤오루와 친해진다. 이후 곱상한 데이에게는 경극 패왕별희의 우희 역이 주어지고, 남성다운 외모의 샤오루에게는 초패왕의 역이 주어진다. 데이는 우희 역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남자임을 부정당하고 부정해야 한다. 데이는 자신을 지켜주는 듬직한 샤오루를 사랑하지만 샤오루는 창녀 쥐샨과 결혼한다. 세 사람은 기묘한 삼각관계 속에서 군벌 시기와 일본 침략시기와 국민정부 시기와 사회주의 수립기와 문화대혁명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아간다.

영화는 이들의 개인적 인생을 그리면서 동시에 이들을 짓누른 역사를 보여준다. 이들의 예술에 정치색은 없었지만 이들은 각 시기마다 정치와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한다.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샤오루는 데이의 동성애를 비판하고, 데이는 샤오루의 아내인 쥐샨의 과거를 비판하고, 샤오루는 다시 쥐샨에 대한 애정을 부정한다.

수십년간 교차되어 왔던 애증이 권력의 폭압 아래 비판장에서 터지면서 어렵게 견뎌왔던 인생과 인연들이 한꺼번에 갈라지고 붕괴된다. 쥐샨은 자결하고 두 남자는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남는다. 문화혁명의 광풍이 지나고 사인방이 숙청된 후 1977년 데이와 샤오루는 어느 텅 빈 강당에서 11년만에 만나서 패왕별희를 연기하고, 데이는 이 관객 없는 무대에서 우희처럼 자결한다.

개인의 신산스러운 삶과 이들에게 가해진 권력이 이 영화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잘 엮이어있다. 군벌, 부유한 자본가, 일본 제국주의, 국민당 정부, 사회주의 정부... 이들의 인생과 예술을 향유하고 억누르는 권력은 매우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러한 여러 권력들의 외면은 제각각이지만 영화 속 예술인이 느낀 그 실체는 모두 폭력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중국 현대의 혼란기를 살았던 개인들의 인생을 볼 수 있고, 또한 중국 현대사를 일별해 볼 수 있고, 동시에 ‘권력과 개인’이라는 역사적 주제를 숙고해볼 수도 있다. 아울러 장국영, 장풍의, 공리라는 뛰어난 배우들의 섬세하고 선 굵은 연기까지 감상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중국학과 30주년 기념 행사인 중국영화제에서 11월 10일에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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