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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침묵의 세계


소통을 강조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소통이 부재한 이 시대에 종종 말에 민감해질 때가 있다. 귀가 예민하게 발달한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소리가 지닌 속성으로 인해 기분이 좌우된다. 쉐턱관 4층 연구실에서 듣는 학생들의 말소리는 언제나 기괴한 소음이다. 웬만하면 견딜 법도 한데, 참지 못할 때가 많다. 가끔 분노하고 화를 내다가 침묵으로 말을 멈춘다.

하지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최승자 역, 까치 2010)에서의 ‘침묵’은 단순히 말이 멈춰 있는 현상, 무엇을 기피하고자 할 때의 말하지 않음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팽팽한 소통의 가능성을 말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고백의 말을 하고, 그의 입술에서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기까지의 침묵 속에는 말 이상의 엄청난 질량의 감정들이 터질 듯 가득차 있음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침묵은 인간이 입을 다물거나 정적 속의 고요함으로 확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침묵은 그 모든 행위들에 앞서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침묵은 언어 이전의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했지만, 침묵은 신이 내린 선물이다. 원래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근거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타락하게 되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의 만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척도로 세계를 재단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언어를 가진 것은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정치인들의 식언에서 친구나 동료의 허언, 지식인들의 아첨의 말에 이르기까지 추악한 말장난에 지쳐 있는 현대인들에게 <침묵의 세계>는 산사의 풍경처럼 원초적 평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피카르트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을 참된 말, ‘말에서 나오는 말’을 잡음어라 규정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잡음어란 “인간의 말이 아닌 죽은 말들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망령들”로 자신이 소멸되리라는 불안을 피하려고 끊임없이 피해 다니는 말, 자신의 불확실함을 피하려고 퍼뜨리는 말, 개개의 사건들이 구별되지 않게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잡음어를 쏟아내며, 다양하고 참신한 비유를 동원하며 노력하지만, 결국은 충분히 말하지 못하며, 말해진 말조차 그 사람에게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채 공허하게 부유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그것은 침묵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이다. 말과 세계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광장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은 말하는 자의 영혼을 표상하기 때문에, 침묵의 미학을 알고 말하는 사람은 절제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 그는 말할 수 없을 때 침묵하며, 말해야 할 때 언어의 절약을 생각한다.우리는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통해 세계 인식, 자아, 사물, 역사, 형상, 시간, 예술, 신앙, 그리고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침묵에 기초하지 않으면 대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없다’는 저자의 결론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침묵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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