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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돋아난 민중의 힘, ‘10월 항쟁’

4・19부터 촛불혁명까지 이어진 시민운동의 맹아

1946년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면서 발생한 사건”(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이다. 동학농민운동이나 3・1운동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일어난 이 항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고, 그 관련자들은 한국전쟁 시기까지 계속 학살되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를 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역사 속에서 공포와 슬픔과 분노의 순간을 자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구술자가 증언해준 이야기를 들을 때, 옛 문서 자료 더미 안에서 뜻밖의 사진이나 기사를 발견할 때, 혼자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순간도 많다. 그러다 보면 이름도, 무덤도, 기억도 없이 떠난 많은 희생자들의 상주가 된 심정으로 지내게 된다.

위의 사진도 처음 볼 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사진에 앳된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영천 보도연맹 사건 유족 정정웅 님이 기증해주신 경북정치학교 졸업 기념사진이다. 경북정치학교는 1946년 초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활동가 양성학교다. 해방 후 대구에는 대중조직이 80여 개가 만들어질 정도로 건국운동 열기가 뜨거웠으나 활동가가 부족했다. 그래서 여러 대중조직의 간부들을 모아 간부훈련 학교를 열었다. 특히, 경북정치학교 제2회 졸업 기념사진에는 학생복을 입은 이가 다수 있고, 중학교 (당시 6년제) 교복을 입은 소년들이 많다. 그들은 당시 각 학교 학생자치회 간부들로 보인다. 이 소년들, 청년들은 식민지에서 막 해방되어 건국의 꿈으로 가득한 채 해방 후 대구 지역 운동을 건설한 새로운 세대였을 것이다. 그리고 반년 뒤 1946년 10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주역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몇 년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움과 애틋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10월 항쟁은 참여주체의 면에서 보면, 특정 계층・계급이 아닌 전체 민중의 항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1946년 10월부터 두 달 동안 계속된 전국적인 항쟁의 출발점이 되었던 10월 1일과 2일의 대구 항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대구 항쟁은 ① 10월 1일과 2일 오전 빈민들의 식량 요구 시위, ② 10월 1일 오후와 2일 오전 파업 노동자 중심의 대구역 광장 시위, ③ 10월 2일 오전 대구경찰서 앞의 학생・청년・시민 연합 시신시위, ④ 10월 2일 오후 시내 전역의 기층 민중 봉기 등으로 일어났다.

대구 항쟁에서는 청년・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수천 명에 달하는 10대 중학생들은 1946년 한 해 동안 대구에서 여러 차례 열렸던 대규모 시민 집회와 시위에서 선도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살려 10월 2일 오전 대구경찰서 앞에서 전날에 있었던 경찰 발포와 노동자 사망에 항의하며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여 경찰의 무장해제를 끌어내었다. 이 시위를 계기로 노동자 파업과 빈민의 기아 시위는 전체 시민의 항쟁으로 전환했다.

학생들은 1946년 10월 항쟁이 진압된 후 분단정부 수립 반대운동을 벌일 때도 가장 앞장서서 활동했다. 대구 지역에서는 10월 항쟁 직후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음에도 1948년 상반기까지 진보적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1947년 2월부터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을 벌였고 3월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3・22 총파업을 벌였다. 봄에는 전국민주학생연맹 산하 지역연합 조직을 결성하여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요구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에는 분단정부 저지를 위한 2・7투쟁과 5・10선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을 때, 1949년 12월 5일 기준으로 대구 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3,332명 가운데 1,056명(32%)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는 성별로는 남성이 2,818명, 여성이 514명이었는데, 여성 가운데에는 학생이 368명, 무직이 98명으로 역시 학생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가창골이나 경산코발트광산 등지로 끌려가 군경에게 학살되었다.

1946년 10월 항쟁은 한국사회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과 건국운동의 좌절에 대한 반발이 국가 형성 과도기에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월 항쟁은 미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과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도 컸지만, 친일파의 재등장에 맞서 식민지시대에 쌓였던 사회적 트라우마가 폭발하고, 농민들의 토지개혁이 지연되면서 대대로 누적된 갈등이 표출되었던 면이 크다. 즉, 이 항쟁은 현대 한국사회의 틀이 형성되던 초기에 미군정과 친일 경찰로부터 건국의 주권을 탈환하고, 식민 통치와 봉건제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일어난 항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미군정의 막강한 물리력 때문에 시민혁명의 과제를 실현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는 4・19라는 뒤늦은 시민혁명이 뒤따랐고, 쿠데타로 좌절된 시민혁명의 이상은 그 후 5・18항쟁 속에 다시 현현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패하고 무능한 보수 정권을 몰아내고자 온 국민이 일어났던 2016년 촛불혁명 속에서 1946년 10월 항쟁의 역사적 DNA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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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