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2.9℃
  • 맑음강릉 3.7℃
  • 연무서울 3.6℃
  • 연무대전 5.6℃
  • 맑음대구 7.9℃
  • 연무울산 7.0℃
  • 연무광주 7.3℃
  • 연무부산 8.1℃
  • 맑음고창 6.2℃
  • 맑음제주 8.5℃
  • 맑음강화 2.7℃
  • 맑음보은 3.9℃
  • 맑음금산 5.9℃
  • 맑음강진군 3.1℃
  • 맑음경주시 6.3℃
  • 맑음거제 8.1℃
기상청 제공

성호학파(星湖學派)의 분열과 서학(西學)인식

1.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성호학파의 위치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과정에서 보면 학파로서 학맥의 계보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경우로는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가 두 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호학파’는 18세기 전반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기호남인(畿湖南人)계열의 성호 학맥의 학자들로서 ‘경세치용학파’로도 일컬어지며, ‘북학파’는 홍대용(湛軒 洪大容)·박지원(燕巖 朴趾源)·박제가(楚亭 朴齊家)를 중심으로 18세기 후반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노론(老論)계열의 학자들로서 ‘이용후생학파’로도 일컬어진다. 성호학파와 북학파는 학맥의 배경이나 학풍의 성격도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호학파는 성호를 종장(宗匠)으로 삼는 성호의 제자들과 그 영향을 받은 후학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므로, 학맥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만큼 성호의 학문적 영향이 뚜렷하게 미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성호는 18세기 전반기의 실학사상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면서 동시에 주자와 퇴계의 도학(道學)전통을 계승한 도학자라는 사실이 그의 학문세계가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홍대용·정약용·최한기(惠岡 崔漢綺) 등 18세기 이후의 중요한 실학자들이 도학의 학문체계에서 벗어나 실학의 독자적 철학체계를 탐색하고 제시하였던 사실에 비교해보면, 성호는 실학과 도학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사상체계가 도학에서 실학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성호의 학문체계에서 도학적 인식과 실학적 관심이 어떻게 그의 제자와 후학들로 이루어진 성호학파를 통해 계승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성호학파의 사상적 성격을 파악하는데 핵심적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성호의 학문세계
①經學:성호의 경학은 도학에 기반하면서 실학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열어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조금 의심하면 조금 진보할 것이요,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할 것이다. 많이 의심하는 것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이 없는 곳조차 의심하여 볼 필요가 있다”<「僿說」, ‘尹彦明質魯’>는 주자의 언급을 인용하여, ‘의심하는 것’(致疑)을 주자의 경학정신으로 확인하고 있다.

②성리학:성호는 “군자는 ‘리’(理)로써 ‘기’(氣)를 통어하여, 활동할 때나 고요할 때나 ‘도’(道)와 합치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리’가 닫히고 ‘기’가 작용하여, 영명하고 지각하는 마음이 도리어 (‘기’의) 부림을 받게 된다.”<「僿說」, ‘色欲’>고 하여, ‘리’를 ‘기’의 주재로 확인하는 ‘주리론’(主理論)을 기본원리로 확인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주자와 퇴계의 성리설을 계승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심’(心)의 존재양상으로 초목(草木)은 ‘생장지심’(生長之心)만 있는 단계지만, 금수(禽獸)는 ‘생장지심’을 바탕으로 ‘지각지심’(知覺之心)까지 있는 단계요, 인간은 ‘생장지심’·‘지각지심’에다 ‘리의지심’(理義之心)이 있는 단계라 하여, 존재양상에 따라 ‘심’의 중층(重層)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초목이나 천지(天地)는 심장이 없으므로 ‘초목의 심’·‘천지의 심’이란 단지 유추한 것일 뿐이라 하여, 엄격한 의미에서 ‘심’은 지각이후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心說」>

③禮學:그의 예학은 단순히 번쇄한 의례절차를 고증하는데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가 정치와 교화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함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를 불변의 원리(天理)와 가변의 조건(時)이 결합된 것임을 주목하여, 의례의 절도란 ‘시’(時)에 따라 조절하게 되므로 ‘예’(禮)에서 ‘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불변성을 중시하여 옛 것을 지키는 사람(守古者)은 배 위에서 칼을 잊어버리고 잃은 자리를 뱃전에다 표시해두듯이 변화에 대응할 줄 모르는 융통성의 결핍에 사로잡혀 있고, 가변성에 순응하여 현재만 좇아가는 사람(循今者)은 소경이 피리를 어루만지며 해가 이렇게 둥근 것인가 짐작하듯이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부분적 변화양상에만 빠져 있게 됨을 지적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친 폐단을 양면적으로 경계하고 있다. 성호는 주자가 ??가례??를 편찬한 것도 바로 이 불변의 기준과 시대에 따른 변화의 종합으로서 ‘예’를 정립하고자 한 것이라 본다.(「星湖全集」, 권49, ‘家禮疾書序’)

④經世論:성호는 생산과 경제 분야의 과제로서 토지제도·수리(水利)·전폐(錢幣)·조세(租稅) 등이나, 사회현실과 제도분야의 과제로서 붕당(朋黨)·학교제도·과거(科擧)제도·노비제도·경장론(更張論) 등 다양한 경세론(經世論)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 현실인식과 개혁대책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실학적 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⑤西學:성호의 서학에 대한 태도는 일방적이 아니라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곧 서양과학지식에 대해 그 탁월성을 인정하고 당시 국내에서 가장 진취적인 이해와 수용태도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서양의 윤리적 인식에 대해서도 유교와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다만 서양종교인 천주교의 신앙조목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이고 허황한 것으로 비판함으로써, 서학에 대해 포용과 비판의 선택적 양면성을 보여주었다.

3. 성호학파의 사상적 성격과 의미
성호는 18세기 전반기에서 안으로 주자와 퇴계의 도학전통을 소중하게 계승하면서 주자학적 세계관을 정밀하게 성찰하였으며, 밖으로 사회제도와 경세의 개혁방책을 검토하면서 넓게는 서양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서학’의 새로운 학풍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그는 도학의 전통을 토대로 확인하면서 실학의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 이 점에서 성호의 학문은 성리학(內)과 경세론(外), 도학(往)과 실학(來), 우리역사-국학(東)과 과학기술-서학(西)의 다양성과 넓은 폭을 가졌던 것이요, 그만큼 포용적이며 진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호의 제자들은 스승처럼 넓은 폭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18세기 전반기의 장년 시절 제자들은 도학쪽에 기울어졌고 경세론과 우리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는 수준이었지만, ‘서학’에 대해서는 성호가 수용한 서양과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만 성호가 비판한 천주교교리에 대해서는 격렬한 비판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었다.

이에 비해 18세기 중반 이후 노년 시절 제자들은 도학에 관심이 약하거나 이탈하는 경향이 강하고 서양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이며 천주교신앙을 수용하는데 까지 나가는 양극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에 대한 인식 속에서 성호의 문인들이 새로운 변동의 요인을 막고나서야 한다는 책임감을 표출한 ‘공서파’와 새로운 변화의 통로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표출한 ‘신서파’가 분열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공서파’와 ‘신서파’로 명명해놓고 보면, 18세기 말과 19세기초의 상황에서보면, 조선정부는 ‘공서파’의 입장을 취하여 ‘신서파’를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학파의 ‘신서파’는 1801년 신유교옥으로 사실상 소멸되었고 정약용이 유일한 계승자로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조선정부의 천주교억압정책으로 ‘신서파’는 붕괴되고 말았지만, 천주교도는 지하신앙활동으로 활발하게 이어져 갔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공서파’는 안정복을 통해 학맥이 근대에 까지 이어져 내려갔지만, 그 도학적 기반에 따라 실학적 성격은 점차 상실하고 도학적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었으니, 성호의 학풍에서 보면 진취성을 잃고 퇴보하였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사회가 붕괴되면서 ‘공서파’의 방향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오히려 소멸된 ‘신서파’가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열어주는 원천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성호학파의 ‘공서파’와 ‘신서파’ 분열현상은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개방향을 압축시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며, 변동기의 사상적 대응방법으로 두 가지 기본방향을 보여주는 사유형식의 전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