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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로맨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서동요는 한국고대의 언어를 설명하는데도 중요한 자료

고대에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왕실과 왕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혼을 정략결혼이라고 한다.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의 결혼도 정략결혼의 한 사례이다. 그렇지만 이 결혼과 관련한 이야기는 설화적 형태로 전하기 때문에 고대 로맨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또 이 결혼에는 서동요라는 향가가 매개체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이 로맨스 이야기는 서동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마를 캐며 살던 백제 서동이 신라 수도에 가서 서동요를 퍼뜨려 마침내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후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설화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과부로 살았는데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지었다. 못의 용이 교통하여 아이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기량은 측량하기 어려웠다. 늘 마를 태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서동이라 이름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와서 마를 동리 아이들에게 먹였다. 아이들이 잘 따랐다. 이내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선화공주님은 남 그스기(몰래) 얼어(嫁) 두고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무왕의 출계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없고, 지룡과 과부녀 사이에서 서동이 태어났고 익산에서 마를 캐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도모하였고, 후일 무왕이 된 것으로 나온다. 때문에 무왕(서동)이 법왕의 아들이냐 아니면 과부녀 아들이냐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지룡과 과부녀 사이에 서동이 태어났다고 하는 설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출생에 이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로는 무령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으로 나오고 있다. 이 문제는 <무령왕릉묘지석>이 발견되면서 무령왕의 출생이 461년(개로왕 7)이고 동성왕 보다는 최소 2-3세살 나이가 많다는 것과 이 두 왕은 이모형제임이 밝혀졌다. 이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오류가 있으므로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과부녀 출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서동이 왕이 되려면 왕족이어야 한다. 그런데 서동의 아버지는 지룡으로 나온다. 용은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큰 인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지룡으로 상징되는 서동의 아버지는 왕족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서동은 익산에서 마를 캐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현실적으로는 몰락왕족이었음을 의미한다. 왕족도 정치적 사건 등에 연루되면 몰락할 수 있다. 몰락 왕족의 후손은 가난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고대나 중세에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조선시대의 일이지만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강화도령으로 생활한 것이 하나의 사례가 된다.

몰락 왕족 출신인 서동(무왕)이 즉위하게 된 것은 법왕 대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법왕은 즉위 2년(600)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을 승려로 삼았다. 왕흥사 창건 목적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법왕의 이러한 정책은 위덕왕 말년 이후 혜왕 대에 이르기까지 실권을 장악한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법왕은 이러한 조치를 취한지 4개월 후인 600년 5월에 죽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2년이 못되었다. 이처럼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법왕이 일찍 죽었다는 것은 반대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법왕을 제거한 실권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여야 하였다. 그러기 위해 자신들이 쉽게 조정할 수 있는 자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실권귀족들은 서동을 옹립하였다. 서동은 몰락 왕족으로서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아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동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30대 무왕이다.

무왕은 실권 귀족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렇지만 즉위 후 그는 실권 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왕권 강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래서 무왕은 즉위 초에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군사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왕권강화 작업의 일환으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은 신라 수도 경주에 가서 서동요를 지어 퍼뜨려 마침내 선화공주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즉 서동 시절에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더벅머리 총각이 공주와 결혼하다는 것은 설화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실제로는 서동이 왕위에 오른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왕실과 왕실 사이의 결혼은 국제결혼이지만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결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는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정치적 판단이 크게 작용하였다. 몰락왕족으로서 왕위에 오른 무왕은 자신의 권위를 높여야 하였다. 동시에 특정 귀족 가문에서 왕비를 맞이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수 있는 외척 세력의 비대화도 막아야 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가 다른 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왕은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백제가 공격해 오면 신라는 이중으로 어렵게 된다. 진평왕은 고구려의 압박을 물리쳐야 하면서 동시에 백제도 신라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였다. 우호관계를 맺게 되면 백제로 하여금 적대적인 행동을 자제하게 할 수 있게 하고 또 고구려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도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결혼 시기는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간 무왕 7년(606)이나 8년(607)으로 추정된다. 이 결혼으로 두 나라 사이는 당분간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은 신라 수도에 가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노래가 서동요이다. 서동요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결혼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고대사회에서 노래는 단순한 오락 기능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음악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처용은 처용가를 불러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신을 몰아내었다. 진평왕대의 화랑들은 혜성이 나타나 불길한 징조를 보이자 혜성가를 불러 이를 물리쳤다. 금관가야에서는 시조 수로가 탄생할 때 구지가를 불러 새로운 왕의 탄강을 맞이하였다. 순정공은 해가를 불러 바다용에게 붙잡혀간 아내 수로부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음악이 가지는 신비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왕은 음악이 가지는 이러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서동은 작곡가요, 작사가요, 가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즉위 후 민초들을 위한 정책을 추지할 때 음악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가운데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진 유일한 향가이다. 백제인이 지은 노래를 신라인들이 따라 부르고 그 뜻을 알았다. 백제말로 된 노래를 신라인이 알아들었다는 것은 백제어와 신라어가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동요는 한국고대의 언어를 설명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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