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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사 - 중재실 명명기념

중재(中齋) 이원주(李源周) 교수를 회고함

내가 대학 2학년 때인 1975년 3월 어느 날, 대명동 캠퍼스의 어느 강의실에서 중재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부끄럽게도 스승에게 드렸던 첫 번째 질문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다가 우리 학교에 부임했느냐’는 것이었다. ‘상주농전(尙州農專)에 근무하다 왔다’는 스승의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진솔하게 말해서 오고 싶지 않았던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학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던 그 당시의 나로서는, 새로 부임하신 스승이라도 내가 가고 싶었던 저명한 대학을 졸업하고 학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소장학자이기를 은근히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첫 수업이 시작되자 실망은 희망으로 바뀌었고, 희망은 점차 환호작약의 가슴 벅찬 기쁨으로 바뀌었다. 스승께서 칠판 왼쪽에다 아름드리 한자(漢字) 한 자를 쓰셨을 때, 나는 칠판의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확,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에 칠판의 오른쪽에 똑같은 크기의 한자 한 자를 다시 쓰셨을 때, 칠판이 바야흐로 균형을 되찾는 기이한 풍경도 지켜보았다. 이윽고 스승께서 한문을 낭송하기 시작하시자 특유의 남저음 목청이 강의실에 장중하게 메아리쳤고, 전체적인 수업의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빼고 보탤 것이 단 한 자도 없었다.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 막힐 듯하던 수업이 끝나자, 나의 가슴에는 큰 돌이 하나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승은 짧은 시간에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뜨거운 경외의 대상이자 이상적 자아의 상징적 모델로 정착되었다. 스승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법(法)이 되었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닮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찼다. 우리들의 ‘스승 닮기’는 우선 스승의 외면을 닮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스승께서 고동색 단벌 양복을 줄기차게 입고 다니셨으므로, 고동색 양복을 따라 입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승께서 발목이 덮일락 말락 한 짧은 바지를 입고 다니실 때는 학생들 사이에 짧은 바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학생들과 어울려 술을 드시기를 워낙 좋아하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슬그머니 술꾼으로 변해버렸고, 한문교육과의 정체성이 마치 술에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승께서는 실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역동적으로 교육활동을 전개하셨다. 다른 무엇보다도 스승은 숙연하고도 장중한 수업으로 학생들을 완전히 압도하셨다. 수업의 내용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을 칼같이 엄격하게 준수하시는 모습부터가 여느 교수와는 전혀 달랐다.

그 당시에는 개강 후 첫 주를 어물쩍 넘기거나, 아직 두 주가 남았는데도 이미 종강을 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마지막 주에 수업을 들어가면 동료 교수로부터 “아직 종강 안 했나 보네. 평소에 좀 열심히 하지 그래.”하고 은근히 핀잔 섞인 충고(?)를 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스승의 수업은 개강하는 시간 최초의 순간부터 종강하는 시간 최후의 일각까지 물샐 틈 없이 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사일정상 한 학기가 모두 끝나도 선택된 교재가 끝나지 않으면 절대 종강하는 법이 없었고, 따라서 6월 말에 끝내야 할 수업을 7월 말까지 진행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제출했기 때문에 성적 제출은 언제나 월등하게 꼴찌를 하셨고, 교무처로부터 성적제출 독촉이 빗발쳤다. 오늘날 같았으면 ‘행정업무 비협조’로 아주 단단하게 낙인이 찍혀, 연봉이 크게 감봉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스승의 수업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단체수업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1:1로 이루어지는 개별수업이었다. 스승께서는 「논어(論語)」 전체를 다섯 번씩 노트에 베껴 적게 하는 한편, 수시로 학생들을 연구실로 오게 하여 그 방대한 「논어(論語)」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게 하셨다. 연구실에 비치해둔 노트에다 외워온 내용을 차례대로 적고, 노트를 덮은 뒤에 스승 앞에서 다시 암송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라는 장편소설을 청산유수처럼 졸졸 읽어야 하는 또 다른 과제도 부과되었다. 만약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더듬거리는 학생이 있으면, 참으로 삼엄하고도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뭐래? 그게 외운 기라? 나가. 나가라는 데 뭘 우물쭈물 해.”
한문교육과 학생들 가운데 서너 번쯤 이와 같은 불호령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스승의 연구실 밖에는 쫓겨나서 훌쩍이며 울었던 그 많은 여학생이 흘렸던 눈물 냄새가 언제나 짭질하게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이 항상 이렇게 무섭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스승께서는 수시로 학생들과 소탈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큰 형님처럼 아버지처럼 상처받은 학생들의 마음을 자상하고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셨다. 오가는 정다운 담소 가운데 학생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확 풀어졌지만, 그 다음 날 학교에 가보면 스승은 어느새 호랑이로 돌변하여 숨도 쉬지 못하도록 질타를 하셨다. 이와 같은 긴장과 이완 속에서 학생들은 뼛속까지 두루 사무치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고, 그러한 감동이 공부에 대한 새로운 의욕을 뜨겁게 부채질하였다. 이렁저렁 세월이 흘러 학기 말이 되면,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논어」 한 권을 모두 다 외우는 가슴 벅찬 성취감에 감격하였고, 스승께서는 ‘책거리’라 부르는 한바탕 소박한 잔치를 마련하여 그간의 노고를 위로함으로써 한 학기의 대미를 장식하셨다.

이렇게 하여 스승의 교육활동은 그 유례를 찾기가 결코 쉽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가령 스승의 제자 가운데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사람이 무려 1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와 같은 숫자는 같은 시점의 서울 저명 대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스승의 문하생 가운데 중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학생이 줄잡아 200명에 가까웠는데, 이와 같은 숫자는 전국의 한문교육과 가운데 최상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보다도 스승의 교육적 성과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별세하신 후에 졸업생들이 벌인 추모사업의 면면들이 아닐까 싶다. 1992년 스승께서 향년 54세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자 제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서둘러 추모사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스승의 유고집을 간행했다. 스승의 유고집이 간행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소리 없이 진행된 작고 아름다운 신화(?)였다.

사업을 위한 성금 모금 과정에서 위원회가 한 일이라고는 졸업생에게 딱 한 번 편지를 보내어 그 취지를 설명하고 계좌번호를 알려준 것이 전부였다. 개인적으로 성금을 권유하는 발언을 한 적도 물론 없었다. 그러므로 혹시 성금이 부족하지 않을까 적잖이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불과 몇 달 후에 그러한 염려는 헛걱정이었음이 드러났다. 정말 놀랍게도 통장 속에는 거의 3,000만 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성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것이다. 300여 명의 졸업생 가운데 무려 150여 명이 성금 모금에 동참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신화는 2002년 스승의 10주기에 다시 한 번 더 일어났다. 10주기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사범대학 앞에다 스승의 거룩한 모습을 닮은 소나무를 심어 추모하는 마음을 담기로 했다.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위원회가 한 일은 지난번 경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고, 소요경비가 500만 원 정도에 불과하므로 너무 많은 돈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뜻까지 함께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87명의 졸업생이 800만 원이 넘는 성금을 보내주어 중재송(中齋松) 식수 행사를 멋지게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정말 일어나기가 힘든 작고 아름다운 신화가 다시 한 번 더 일어난 것은 2012년 5월이었다. 위원회에서는 별세 직후부터 스승의 산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집안의 이유있는 반대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스승의 20주기를 맞아 비석을 세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소요되는 예산 1,500만 원을 성금으로 모으기로 했는데, 이번에도 109명의 졸업생이 무려 2,000만 원이 넘는 성금을 보내주어 최고급 돌에다 저명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 최상의 비석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교육의 성공 여부를 단순히 돈으로 측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감동의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로 돈보다도 더 정확한 것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숫자도 많지 않던 졸업생들이 순도 100%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별세하신 스승을 위해 번번이 이토록 거액의 성금을 조성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일 수가 없다. 요컨대 그것은 스승의 그 뜨겁고도 숙연했던 사랑이 학생들의 가슴 속을 두루 사무치게 감동시켜서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 알다시피 ‘스승’이란 말 앞에는 언제나 ‘거룩한’이라는 관형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해서 모두 스승이라 부를 수는 없다. 방학보다 개학을 더 좋아하고, 하교보다 등교를 더 좋아하는 분,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의 표정보다 수업하러 들어갈 때의 표정이 더 환하게 빛나는 분이라야 비로소 겨우 스승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중재 스승은 ‘거룩한’ 앞에다가 ‘위대한’이라는 관형어를 덧붙여도 좋을 우리 모두의 스승이셨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는데, 그 큰 은혜를 갚기는커녕 저토록 푸르고도 높은 하늘 아래 고개를 숙이고 용서해주십사 빌고 싶은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천고마비의 가을이다, 아아 !

* 이 글은 지난 9월 11일 계명대학교 영암관에 나의 스승이신 중재 이원주 교수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인 ‘중재실’을 마련하고 명명식을 거행할 때, 스승에 대해서 회고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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