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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판각시작 천년 기념

고려대장경의 진실


금년은 고려 초조대장경 판각을 시작한지 1000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대구박물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대장경 전시회가 열렸고, 현재 해인사 일원에서는 단풍놀이와 더불어 대장경 천년기념행사로 연일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관련자료 부족과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일본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생긴 선입견 탓으로 역사기록에 대해 잘못 이해하여 해인사 대장경판은 선원사에서 1236년에서 1251년까지 판각하였다고 잘못 알려졌다. 이렇게 대장경의 역사적인 진실이 상당부분 왜곡되었다. 필자는 초조대장경 판각시작 천년을 기념하여 고려대장경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은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판당에 있었던 것이다.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판이 불타 버려서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4천 번뇌에 대치하는 8만4천 법문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경의 판각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고종 38년 9월 임오일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으로 가서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년(1232) 몽고 침입 때 불타 버려 군신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이 걸려 마쳤음을 고유한 고유제에 참석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그동안 대장경 판각을 고종 38년(1251)을 기점으로 16년 전인 고종 23년(1236)에 판각을 시작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다.

팔만대장경판의 권말에는 “정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등으로 간행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간기를 조사하여 정리해 본 결과,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1237년에 2종 115권을 판각한 것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목록」 1권 판각을 마지막으로 12년이 걸려 판각을 모두 완료하였다.

「고려사」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판각했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1233년부터 대장경 조성 사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게 된다. 결국 1233-1236년의 판각을 위한 사전 준비 기간을 거쳐, 1237-1248년까지 12년 동안 판각을 모두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249년에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뒤를 잇는 집권 과도기를 거쳐 1251년(고종 38)에 와서야 의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고려대장경판각은 어디에서 했을까? 그동안 대장경 판각장소가 선원사라고 잘못 알려져 왔다.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이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에 임금이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 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고려대장경은 선원사에서 판각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선원사는 대장경판 판각이 거의 완료된 고종 32년(1245)에 창건되었고, 더구나 공민왕 9년(1360) 윤 5월에는 “왜가 강화를 노략질하면서 선원사와 용장사로 침입하여 300여명을 살육하고 쌀 40,000여석을 약탈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대장경판이 선원사에 있었다면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기사는 선원사가 항구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용산강으로 실어 나가기 위해 옮겨 놓았던 곳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이었기에 교통의 요지인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에 위치했던 것이다. 지금 선원사는 일제 때 땅을 메운 곳이라 한다. 그리고 강화도는 당시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피난 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판각사업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다.

고려사 열전 최이 조를 보면,
전양공 최이는 역대로 전한 대장경판이 모두 적병의 불사른바 되었으나 국가에 변고가 많아다시 새로 만들 여가가 없었는데, 도감을 따로 세워 사재로 새긴 판이 거의 반이나 되어 나라를 복되고 이익되게 하였으니 그 공과 업적을 잊기 어렵다. 아들인 항은 가업을 계중하여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난을 제압하였고 대장경판에 재물을 이주하여 공역을 독려하여 고성의 강찬을 갖게 되니, 중외가 복을 받게 되었고...

이렇게 강화정부는 대장경판을 판각할 여력이 없었고, 최이가 대장경판 판각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최이는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고, 전주 지방 일원은 그의 아버지 최중헌 사압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만종과 만전이 각각 단속시 쌍봉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경상도에서 비축한 쌀 50만석을 특여하여 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안 조에서 보면, 안의 초명은 분이니 ... 이가 그 재능을 사랑하여 임금에게 말씀드려 국자제주를 수여하니 안이 이가 전권하여 남을 시기하고 해치는 것을 보고 그 해를 멀리하고자 남해 퇴거하여 부처님을 좋아하며 명산 승찰을 편력하고 사재를 희사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

이 기록을 보면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고 하였다. 정안은 국자제주를 그만둔 고종 28년(1241)이후에 남해로 내려가 대장경 판각의 운영 경비를 부담하였던 것이다. 정안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동지역의 호족출신이었고 또한
최이의 처남이었다.

그리고 대장경판이 끝나고 난 뒤 1249년에는 남해의 자기 집을 사찰로 꾸미고 일연선사를 맞아들였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렇게 남해는 대장경판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위의 <간기를 통해 본 대장경판 판각 연도별 분류표>에서 보듯이, 실제로 정안이 남해로 내려가서 대장경 판각에 참여한 1242년부터 5년 동안 전체 대장경 판각의 3분의 2 이상 판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대장경의 절반 정도를 간행했다는 내용은 정안이 당시 최우와 약속하고 이 사업을 주관했고 대장경 판각사업이 남해에서 행해졌음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장경판의 간기를 조사해 본 결과 대장경판은 대장도감 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것도 72종이 있다. 이 가운데 전체가 분사판인 것은 51종이고 나머지 21종은 분사판과 대장도감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판각기간은 계묘년(1243)에서 정미년(1247)까지 5년간이었다. 이 가운데 경순 1404번 법원주림은 100권 가운데 12권이 대장도감판이고, 86권이 분사대장도감판으로 모두 갑진년(1244)에 판각된 것이다.

여기서 각수를 조사해 본 결과, 동일한 각수가 대장도감판도 새기고 분사대장도감판도 새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경순 800번 불설의족경은 2권짜리 경전인데 권1은 분사판이고 권2는 대장도감판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동일한 각수가 같은 장소에서 대장도감판과 분사판을 함께 새겼던 것이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식읍지가 진주일원이었고, 그의 처남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을 간행했다고 하였고 고종 28년(1241)이후에 남해로 내려가 대장경 판각의 운영 경비를 부담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남해는 대장경판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분사대장도감판 가운데 『종경록』이 있는데, 권27에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이란 간기가 새겨져 있어 그동안 추정해 왔던 대장경판 판각 장소가 남해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더구나 제 27권를 새긴 ‘최동’아란 각수는 대장도감판인 『법원주림』 권72와 『아비달마집이문족론』 권10 등의 판각에도 참여한 각수였다. 이로써 대장경판은 모두가 남해에서 새겨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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