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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문화·예술의 역사를 한눈에, “뿌리 깊은 유교적 반골정신의 지역성에 연유”

<대구미술의 형성과 특성>
- 이중희(동양화·교수)


우리나라에서 지방 예술의 형성은 근대시기부터이다. 특히 영남의 중심지 대구에는 근대의 관문에서부터 지역의 최고 지성인들이 하나로 응결된 용광로처럼 뜨거운 지성과 민족혼의 열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것이 사회운동면에서, 문학에서, 전통화·서양화·사진계 등 미술문화면에서 공통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즉 근대초엽 지역의 최고 지성인들에게는 ‘문화예술계’가 처음부터 ‘대구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인식되어 그들의 의기투합된 정신세계를 펼치고 있었다는 점이 대구 문화예술의 성격이 어떠하냐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석재 서병오가 개조시키고 그후 죽농 서동균이 만개시킨 영남 문인화로서 수묵 사군자화도 그러한 배경으로 대구다운 전통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강성의 배일 민족주의자이자 한학자로서 이상화의 친형 이상정과 이쾌대의 친형 이여성 두 사람은 신시대를 상징하고 새 시대의 빛으로서 서양화를 일으켜, 전통수묵화와 유사한 수채화를 본령으로 하였다. 이들이 세운 수채화풍은 그후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등에게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대구가 수채화 지역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30년 ‘향토회’라는 한국 초유의 이념적 서양화 단체가 탄생된 것도 이상정의 제자 서동진과 민족주의자 김용준, 독립운동가 최화수 등이 의기투합하여 결성시킨 것이다. 일제시기 대표적인 서양화가 이인성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곳도 바로 향토회 시기였다. 나아가서 리얼리즘의 사진작가 구왕삼이 민족적 시각에서 피사체를 선정하여 강렬한 민족혼을 사진예술의 본령으로 삼았던 것도 지성적 민족혼이 흐르는 대구라는 지연(地緣)에 연유한 것이다.

대구지역 문화예술이 이렇게 의식 높은 민족주의자들의 본원지가 되었던 것은 역시 뿌리 깊은 유교적 반골정신의 지역성에 연유한다. 『씨 뿌린 사람들』(1959)의 저자로서 지역 선각자들과 고락을 같이 했던 백기만 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향토출신의 우수한 예술인들은 거개가 인품이 높고 지조가 굳어서 항일적 위치에서 민족예술가의 명예를 확보한 것이 특이하고 탁월한 점”이고, 그 원인은 자고로 문사文士를 존숭하는 “추로향(鄒魯鄕)-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이라는 별칭을 들어오는 영남의 전통적 기풍에서 찾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대구는 민족정신의 본향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정신이 미술문화에서 강렬하게 발현되고 있었다.

대구미술의 성격은 크게 3가지로 함축할 수 있다. 첫째, 근대초엽, 대구의 문화예술이 시작단계부터 활성화된 것은 대구정신이라 할 민족혼을 담는 그릇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둘째, 대구정신의 계승은 그후 부정성에 대해 야합하지 않은 저항적 자세로 승화되어, 직접적 행동에 의한 실천적 돌파력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대구가 현대미술의 기점이 된 지역이었다거나, 세세하고 감성적인 화풍을 떠나 에너지 넘치는 패기와 야취성이 강한 화풍, 스케일을 가진 장대함이 특색화 되어 나타난다. 셋째, 유교의 자연친화적 삶에서 배양된 황토적인 토질감은 끈끈한 저력으로 승화되어 예술적인 표현양식화로 발현된다. 그 때문에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예술세계를 성취한 많은 미술가들이 있었고, 화풍에서는 밝고 화사함보다는 무채색의 끈적끈적한 질감과 중후함이 농후하게 나타난다.<대구현대미술의 태동과 전개>
- 박남희(경북대학교 예술대학미술학과 ·교수, 미술사학박사)


대구는 한국근현대사의 중심도시로 일제 강점기에 신문화운동, 개화운동의 성격으로 수용한 서양화의 기법이 대구의 역사성과 장소성에 부합하여 한국근현대미술의 범주 안에서 한국현대미술, 한국추상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대구일원에 내재된 예술적 토양과 전통적 미의식, 미술사적 흔적, 영남선비정신을 통해 대구라는 장소성이 대구현대미술을 이루는 토양을 형성하였다.

대구현대 미술가들은 대상의 재현적, 묘사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미술가의 내면을 의식화하고, 불안한 시대상황에 반응하여, 한국현대사에 절망한 현실을 거친 붓놀림과 마티에르를 통하여 표현하려고 하였다. 전통적 선비정신, 시대성을 추구하려는 개척자적 정신으로 기존의 아카데미즘에 저항하고, 내면을 형상화하는 특성을 구축하였다. 대구현대미술은 추상회화의 전개와 맥을 같이 하고, 다양한 추상회화의 표현양식 중 한국의 전통수묵화에서 근거한 기를 응축한 필법을 연상시키는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표현주의가 중심을 이루었다.

한국추상회화가 자연친화적인 낭만적 감성 표현, 자연에 근거한 추상표현에 치중할 때에, 대구추상회화는 미술가의 내적 정서, 분노와 울분을 야성적 에너지로 거칠게 화면상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호하였고, 추상회화의 성립과 확산이 일본현대미술, 한국추상회화와 비교하여, 더 빠른 시기에 확립되었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은 한국현대미술의 중심에 있었고, 한국 전역에 모더니즘을 확산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대구현대미술의 태동과 전개는 시대적 격동에 맞선 전후세대들의 시대의식의 발로이며, 정의로 향한 불굴의 투지와 저항정신의 표출이었다.

권위적이고 제도화된 현실에 저항하며 새로움을 향해 질주하는 강직한 선비정신과 패기 넘치는 야성적 기질이 전통적 미술 환경과 어우러진 결과물로서 민족적 패기와 대구 혼을 표현한 것이었다.<대구 근대사진의 형성과 전개>
- 김태욱(대구카톨릭대·강사 / 대구사진문화연구소·소장)


대구 근대 예술사진의 태동에는 사진공모전과 최계복이 결정적 동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전조선사진살롱>의 개최와 함께 화려하게 등장하는 최계복은 일본에서 사진으로 유학까지 한 최초의 지역 인물이었다. 그의 사진 작업은 서양 낭만주의 회화에서 출발하는 화면 구도와 함께 1880년대부터 서구 사진계를 지배했던 픽토리얼리즘을 도입한 당대 일본 예술사진에 정통해 있었고, 당대 일본의 사진작가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회화적 미학을 보여주었다.

그의 화려한 공모전 경력은 해방이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지역 사진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광복 이후 계속되는 사진공모전과 지역 사진계의 흐름이 과거를 그대로 모방하는 구습에 얽매여 새로운 작업을 창출하지 못하고 정체되어있을 때, 구왕삼은 사진과 이론에서 리얼리즘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진은 당대 한국 사진가들에게서 보기 힘든 시대적 감성과 뛰어난 독창성을 가진 것으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조선미(朝鮮美)’를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의 사진론과 비평은 한국 사진계 전체가 과거의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의 사진계와 벌이는 치열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의 강력한 이론 전개와 비평으로 분위기 반전에 성공하여 강력한 리얼리즘 사진운동을 전개하였던 대구사진계는 이후 해외공모전으로 시선을 돌려 성과를 내기 시작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면 그곳에 눈이 함몰되는 역사의 과정을 반복해 간다. 동시에 대구사진계는 리얼리즘 계열과 살롱사진의 뒤를 잇는 조형주의 계열 상방 간의 치열한 비평과 이론적 다툼을 벌이며, 대구 근대사진의 꽃을 피웠다. 당대의 치열한 작업 정신과 상방 간의 자극이 주는 긴장감은 지역의 사진 정신을 더욱 갈고 다듬게 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공모전에의 몰입과 자극적 대치는 양대 진영 간의 시간이 흐르며 감정적 골을 깊게 파고 들어가 1960년대 말에 이르면 대구 근대사진의 종막을 내리게 하였다.

대구의 근대사진은 지방에서 벌어진 단순한 사진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았던 최계복 이외의 사진가들이 있었고, 광복이후 한국 사진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모색했던 구왕삼의 사진과 이론들은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장하여 한국의 사진 이론과 비평에 생기를 불어 넣었고, 지역 사진가들의 활발한 해외공모전 참여와 성과는 지역인들의 자부심을 공고하게 하였던 특징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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