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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를 대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절제된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해

채식주의는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음식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다. 이것은 매우 애매할 뿐 아니라 채식주의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다. 왜 붉은 살코기만을 먹지 않는지, 왜 동물의 알은 허용하고 유제품은 안 되는지, 반대로 유제품은 허용하고 동물의 알은 왜 안 되는지 등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또한 음식의 허용 범위가 같더라도 그 이유와 근거는 서로 전혀 다를 수 있다. 채식의 이유가 자신의 건강, 동물권 및 환경 보호 등으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허용해야 하는 음식의 유형보다 그 이유와 취지가 더 중요하다면 그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채식주의를 도덕공동체에 따라 각각 인간, 동물, 생명체 그리고 환경을 위한 채식주의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위한 채식주의 관점에서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채식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가장 적절한 식문화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채식주의에 대한 두 가지 근거, 인간의 건강에 근거한 영양학적 논증과 경제적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대다수 채식주의자들이 채식의 이유로 들고 있는 영양학적 논증에 따르면, 육식은 혈중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높이고 혈당과 혈압을 증가시켜 심혈관 질환을 유발하는 것에 반해, 채식은 그것들의 농도와 수치를 낮추어 주기 때문에 인간의 건강에 보다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어(R. M. Hare)는 육식이 인간의 건강에 유익하지 않다는 것에 근거해서 채식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육식이 여러 질환을 유발한다고 해서 모든 육식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식을 가려먹고 적절하게 소비한다면 인간의 건강에 유익할 수 있으며, 많은 영양학자들도 생선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헤어는 건강의 측면에서 약간의 고기를 먹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린다. 

 

플라톤의 두 번째 논거는 고기를 생산하는 것보다 곡식을 생산하여 식량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적은 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육류 생산 방식은 공장식 축산에 의존하고 있다. 소고기에 포함된 단백질 1파운드를 생산하기 위해 사료에 포함된 21파운드의 단백질을 소모하는 경제적 비효율성과 더불어, 많은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서 수십 배에 달하는 곡물생산이 필요하며, 또한 그것을 위한 많은 농경지가 필요하게 되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헤어도 곡물재배를 통한 식량생산이 축산에 비해 경제적이며, 많은 인구가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축산에는 적합하지만 곡물재배에 적합하지 않는 지역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토양침식으로 인해 가축을 키울 수 있지만 곡물재배가 불가능한 지역도 있으며, 자메이카의 대부분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가축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동물을 위한 채식주의의 관점에서 싱어는 육식을 위해 동물에게 자행되는 학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엄청난 양의 고기를 소비하고 있으며 보다 연한 육질의 고기를 찾는다. 육식이 바로 동물학대와 종 차별주의의 근원이며, 고기로 이루어진 우리의 식탁이 그것의 원인인 동시에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싱어에게 있어서 모든 육식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는 아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동물의 고기가 필요한 경우, 예를 들면 곡물을 구할 수 없어 동물 고기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에스키모인과 같은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육식을 허용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동물들의 복지가 보장되는 환경에서 방목하여 사육된 고기일 경우, 육식을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고기가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된 것인지 방목되었는지를 완벽히 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지막 경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싱어는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와 어류 등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갑각류나 굴과 조개와 같은 연체동물은 고통을 느끼는지 의심스러우며 확신할 수도 없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싱어는 특수적인 환경에서의 사람들을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생명체를 위한 채식주의의 관점에서 테일러는 악행금지의 원칙을 주장하며 채식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악행 금지의 의무는 내재적 선을 가진 생명체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이다. 이 규칙에 따르면 우리의 미각을 충족하기 위한 육식은 물론 식물에게 해가 되는 채식도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으며, 생태계 파괴와 같은 다른 생명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육식과 채식도 허용할 수 없다. 하지만 테일러는 자기 방어의 원칙을 들어 다른 존재가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경우 인간은 그 존재를 죽일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일부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을 위한 축산업이 환경과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이므로 생태계 보존을 위해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식의 과잉 섭취가 토양 오염, 엄청난 양의 물 소비, 온실 효과 등 환경오염의 다양한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과 생태계 보전의 측면에서 우리 모두 채식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우선 육식 그 자체는 생태계 전체의 안정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 헤어는 생태계 한계 내의 어획과 사냥은 허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많은 수의 특정한 동물로 인해 생태계가 위협받는다면 오히려 그들을 먹는 것이 옳은 일이 된다.

 

이렇듯 도덕공동체에 따라 분류한 채식주의 또한 자신을 정당화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인간의 건강과 경제적 효율성에 근거한 채식주의의 주장은 오히려 절제된 육식을 허용하거나 지역에 따른 육식을 허용하게 한다. 또한 동물의 고통과 권리를 위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채식주의도 학대 없이 사육된 고기를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가 모든 생명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살아있는 존재를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며, 때론 육식도 허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환경을 위해 채식해야 한다는 입장도 생태계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육식을 허용할 수 있다. 

 

우리의 건강과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서, 동물의 고통과 권리 그리고 생명체를 위해서 그리고 환경과 생태계 보호라는 채식주의의 근거들로부터 우리 모두 채식을 해야 하고, 모든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과다한 육식이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행위이며, 부분적인 또는 절제된 채식주의(demi-vegitarianism)가 보다 바람직한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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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국론 분열’ 그리고 ‘verum-factum’에 대한 유감 이른바 ‘조국 대전’으로 아직도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국론 분열’을 걱정한다. 한 쪽은 ‘검찰 개혁’을 외치며 촛불을 밝히고 있고, 다른 쪽은 ‘조국 구속’, 심지어 ‘대통령 탄핵’까지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으며, 이 진영들 간의 대결에서는 그 어떤 상호 인정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으니, 그 걱정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걱정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이다. 첫 번째 걱정은 방금 언급한 ‘걱정’에 대한 걱정이다. ‘국론’이라는 것은 그 존재 사실부터가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당위성의 관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 시민사회적 상식이 아닐까. 국가란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 속에 살면서 저마다 다른 가치와 신념을 지닌 자립적 주체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건전한 국가란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인정하면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경쟁, 교섭, 연대 등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국론’이라는 단어에는 오로지 한 방향의 주의만이 절대적으로 옳으니 모든 구성원이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그러기에 그 단어의 소극적 추종자들은 ‘분열’을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