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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문제, 우리정부 다음 세대 위해 ‘우리땅’이라는 목소리를 내야”

중국과 우리나라는 강(압록강 두만강)하나를 두고 이념적 관계로 50여 년을 적대시하고 살아왔다.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1992년 8월 한중수교를 맺은 지 금년이 20년이 되는 해이다. 한중수교문서에 “영토(간도)존중 보존”이란 항목이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이 항목에 대한 반론 없이 수결하고 말았다.

중국은 이것도 부족해 2004년 초 동복공정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우기기 시작했고, 중국정부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억울함과 분노가 폭발 하였다.

언론과 방송에서 연이어 중국의 역사왜곡을 보도하였고 중국에서는 고구려역사 왜곡이 양국 간에 외교 문제로 번지자, 문제의 심각성을 받아들여 2004년 8월 24일 우다웨이 (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한국을 방문해 당시 외교통상부를 방문하여 반기문 장관을 만나 “중앙정부와 관영언론 차원에서 왜곡을 추진하지 않겠다”라는 ‘5개 양해사항’에 구두 합의 후 반기문 장관에게 한국 사람이 중국 동북3(요령성, 길림성, 흑용강)성에 관광을 와 이 지역이 한국 고유의 영토(간도)이고 찾아야 할 땅이라고 한다고 하니 한국 정부에서 중국과는 영토분쟁이 없다는 것을 문서화해 달라고 요청을 하자, 반기문 장관은 비정부 차원의 주장이니 문서화를 해 줄 수 없다고 전하였다.

실상 동북공정은 고구려역사 전쟁이 아니다. 권원이 없는 일본과 중국 간에 1909년 9월 4일 청일간도협약으로 자신이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간도지역이 분쟁지역임을 안 중국은 한반도 통일 후 간도영유권문제를 고착화 하기위한 방편으로 고구려역사를 중국지방정부라고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비롯 발해 역사왜곡과 우리의 성산인 백두산을 중국영토로 편입하려 하고 우리의 혼인 아리랑, 태권도 등을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고 최근에는 만리장성을 우리나라 고구려, 발해성을 합쳐 2만리장성으로 왜곡하고 있다.

간도지역은 한중 양국 간에 4종류의 분쟁사가 있다. 첫째, 봉금지역은 공동 관리해온 중립지역으로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영토이다. 둘째, 백두산정계비 비문에 의한 동위토문은 정계비→토문강→송화강→흑룡강→동해 연결 선상의 동남지역 영토이다(1712년 5월 15일 백두산정계비 건립 비문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고 돼있는데,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을 기점으로 동남은 대한민국 영토이고 동북은 중국의 영토인 것이다). 셋째, 강희제의 명을 받아 중국전체의 땅을 측량하고 만든 한중국경선에 의한 영토이다. 넷째, 청일간도협약 이후 대한제국시기의 지도에 나타난 함경북도 종성군 두만강 건너 간도 영토이다.

또 청의 강희제는 중국의 지형에 관심이 많았던 (예수회선교사로 와 있는)프랑스인 J. B. B. 당빌(d’Anville) 등에게 중국 전체의 영토 측량을 명하였다. 실측 명령을 받은 당빌 선교사는 1708년 부베, 레지 등의 선교사 10명과 현지에서 양성한 중국인들을 동원, 만주, 몽고지방을 시발로 중국 전체의 영토를 8년에 걸쳐 측량을 마무리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2년에 걸쳐 작성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42장을 강희제에게 제출하였다.

측량하고 작성한 원고를 프랑스 파리로 가져간 것을 근거로 하여 17세기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도에는 한국과 중국 국경선은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 북쪽 지역에 점선으로 국경 표시가 되여 있다. 압록강 북쪽에 KOREA란 국명이 되어 있고 지명까지도 ‘PING NGAN’이란 명칭이 압록강 북쪽에 명시되어 있다. 중국은 일방적으로 중국영토를 확실히 하고자 측량하였지만 측량지도는 간도가 중국 영토라는 것을 부정을 하고 있다.

정계비 건립 이후에도 조선조정에서는 서북경략사 어윤중 보고에 의해 간도문제를 중요시하게 되였다. 1897년(대한제국 원년)고종 23년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趙存禹)로 하여금 백두산정계비와 분수령 및 간도 감계문제 등을 철저히 조사보고토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조존우는 지형을 조사하여 세밀한 도본을 작성하고 해설을 첨부하여 제출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徐相懋)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였으며, 1898년 정부는 종성주민 오삼갑(吳三甲)등이 올린 상소를 좇아 백두산정계비에 의한 토문, 송화강, 흑룡강, 동해 유입 한중국경조사를 내부대신 이건우(李乾憂)와 함경도관찰사 이종관(李鍾觀) 에게 명하고 경원군수 박일헌(朴逸憲)과 관찰부주사 김응용(金應龍)을 파견하여 동년 4월 16일부터 5월 15일까지 철저한 조사를 다음과 같이 실시했다.

1900년 평안북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였다. 1902년 5월 21일 이범윤(李範允)은 간도관리사로 임명받고 간도조선인을 보호하기위한 사포대를 조직하고 모아산, 마안산, 두도구 등에 영소를 설치하여 간도한인을 보호하였다. 그 비용은 간도조선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운영하였다.

이와 같이 간도는 조선에서 실질적으로 행정권을 행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1900년과 1903년에 서간도 및 동간도(북간도)를 28개면 행정적으로 평안북도 및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주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행정과 군인훈련비로 충당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치안 및 경비를 수행했고 조선 관병들이 중국의 유민 침투를 저지하기도 했다. 이는 명백히 국가의 행정단위로서 기능을 했다는 증거이다.

간도(만주)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민족이 3천3백년이 넘게 지배하였으며, 동이계 민족(요·금·원)이 724년, 한족(漢族)은 500년 정도이다. 특히 청나라 시대(1667년) 이후에는 한족은 출입자체가 금지되었으며, 현재의 만주지역에 한족이 거주한 것은 12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고려시대 윤관장군은 9성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 700 리의 공험진 선춘령에 국경비를 세웠으며 공민왕은 1370년 이성계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요양·심양지역)를 정벌토록 하여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 해 지용수와 이성계는 요양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고려는 동녕부의 심·요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통고하였다. 이성계 선조 4대가 두만강ㆍ훈춘ㆍ북간도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또한 세종 때 김종서는 이 지역에 6진을 개척하였다.

간도(만주)지역을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관리 지배해왔다고 해서 단순히 과거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간도지역은 조·청간에 많은 분쟁이 있었던 지역이다. 간도지역은 봉금지역에 대한 영토 한·중 중립 지역 문제, 1712년 백두산정계비 비문 상의 동위토문 관련 영토문제, 청국 황제 강희제 명에 의해 중국영토 전체를 측량하고 만든 한중국경은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 이북 지역이 조청 국경으로 되어 있는 문제, 또 청·일 간도협약 이후에도 함경북도 종성 두만강 건너편 북간도에 대한 영토문제들이 있다.

청·일 간도협약 무효안이 외교통상부 2004년 10월 22일 국정감사를 하였다. 그 당시 외교통상부 반기문장관은 청·일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영토문제는 달리 생각하여야 된다는 후문도 있었다. 영토는 힘의 논리에 의해 크고 작음이 있다. 간도는 중국이 불법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우리정부에서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중국정부에 천명하면 지금 당장 찾지 못해도 다음 다 다음 세대에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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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