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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철학원 발표 논문 초록 - 신라, 불국토를 꿈꾸다

호국불교를 지향하면서 교종불교 가운데 육계불교를 주류

●중고기 신라 왕경, 불국토의 기반을 닦다

중고기의 신라 왕경은 매우 역동적인 변화의 시기로, 가장 큰 요인은 불교의 공인이었다. 신라 왕경과 불교와의 공식적인 관계 형성은 527년 불교 공인을 전후한 시기이다. 법흥왕 대에 불교옹호세력인 신라 왕실이 불교의 권위를 빌어 왕권강화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불교수용에 적극적이었고, 천신을 모시던 귀족세력은 자신들의 지위가 천신의 권위와 함께 격하되는 상황에서 반대세력으로 존재하였다. 법흥왕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신라왕경은 불교공인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왕경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왕릉이 주변 산록으로 이동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는 법흥왕을 ‘哀公寺 北峯에 장사하였다’는 기사를 실은 이후 경명왕까지 왕릉의 위치를 대체로 사찰의 방향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반면 상고기의 경우 왕릉의 위치에 관한 기사는 오릉과 미추왕릉 만이 있을 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김부식이 유학자로서 왕릉을 도성 내에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법흥왕릉 이후부터 史書에 남길 가치가 있다고 본 때문인데, 그는 왕릉의 장소와 그 방향 표시로서 사찰을 언급하여 陵寺로서의 역할에 주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릉이 시내에서 산록으로 옮겨진 것은 불교공인 이후 왕경이 변모되는 전조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왕릉이 빠져나간 왕경의 중심부에 흥륜사, 황룡사 등의 국찰이 조성된다. 신라 최초의 국찰인 흥륜사는 법흥왕때부터 천경림에 조성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낙성은 진흥왕대에 이루어졌다. 진흥왕은 신라건국 후 10주갑이 되는 갑자년을 택하여 흥륜사를 대왕흥륜사로 낙성을 한 것이다. 이는 흥륜사의 창건이 불교가 신라와 함께 영속하기를 바라는 진흥왕의 염원이 담겨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황룡사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출현하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사찰로 하였는데, 이곳은 紫宮인 태극전을 조영하려다가 불사로 바꾼 것이다. 그 이유를 추정해 보면, 북위불교를 알고 있었을 혜량이 북위(386-534) 낙양의 영녕사 불전이 태극전과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었던 점을 들어, 자궁 대신 사찰을 창건하도록 건의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군신의 반대를 무마하고자 황룡의 출현이라는 극적 상황을 연출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정황은 결국 신라 왕경의 중앙에 불사를 건립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가능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왕릉이 산록으로 이동했기에 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왕경에 사찰이 들어서고 출가가 허용되면서, 고구려. 백제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던 중국과의 교류가 중국유학승들을 통해 직접적인 물꼬를 트게 된다.

신라는 내물왕 26년(381)에 위두가 고구려사신을 따라 전진에 다녀옴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또 실성왕이 고구려에 인질로 있던 때가 광개토왕 시기라는 점, 호우총의 호우, 전도승의 활동 기록은 그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백제 사신을 따라 양에 다녀온 이후, 신라는 양, 진과의 교류를 통해 남조불교가 유입되었는데, 양나라로부터 佛舍利가 봉송되고, 진나라로부터 불교경론이 유입되었다.

●전불시대 칠처가람과 신라의 성전사원

신라 왕경에는 7처가람과 성전사원으로 대변되는 국찰들이 포진해 있었다. 7처가람은 전불시대의 7처가람의 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흥륜사, 담엄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로 대개 신라 중고기에 창건된 사찰들이나, 사천왕사가 679년에 완공되었으므로 이 7처가람설은 신문왕대에 만들어진 설로 보고 있다.

한편 신라 중대의 대표사원격인 성전사원은 문무왕이 677년에 영창궁성전을 두면서 사천왕사성전도 비슷한 시기에 설치되어 신라 중대 성전사원의 단초를 열었다. 신문왕 4년(684)에 영흥사성전을, 신문왕 5년(685) 봉성사성전이 설치되면서 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봉은사, 영묘사, 영흥사의 7곳의 성전사원이 존재하였으나, 한꺼번에 사원성전이 설치된 것은 아니다. 이들 7처가람과 성전사원 7곳 가운데, 사천왕사와 영흥사. 영묘사는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천왕사는 성전사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사천왕사는 명랑이 문두루비법을 시행한 곳에 세운 기념비적인 사찰로, 선덕여왕릉이 도리천에 세워진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중고기 흥륜사에서 시작되어 남산으로 연결된 미륵불 중심의 도솔천 개념이 중대에 사천왕사가 들어서면서 점차 그 중심이 도리천으로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성전사원은 왕실이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처 내지 국가적 의례가 행해진 官寺로서 奉祀의 기능이 강조되어 왔다. 왕실사원으로서의 성전사원은 경주 중심부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사천왕사, 북으로는 봉성사, 서로는 영묘사, 동으로는 봉덕사, 중앙의 영흥사 등이 왕경의 사방과 중앙에 의도적으로 설치되어 사방 관도를 통해 왕경으로 들어오는 이들로 하여금 바로 접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성전사원은 불교적 국가의례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봉사관련 관부로 보기도 한다.

성전사원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 신문왕 4년인 684년이고 7처가람설이 형성된 것이 신문왕 9년 무렵이라고 볼 때, 중고기에 의도적으로 왕경에 불교적 성역공간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신라 중대에 왕경이 불국토라는 개념을 형성시키면서 이에 대한 구상이 왕경에 실천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국사와 창림사 - 새로운 사조의 포용

신라 경덕왕 대에는 先妃인 삼모부인과 後妃인 만월부인이 각각 황룡사와 불국사, 황룡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불사를 벌이었다.

만월부인의 후견인은 표훈대덕과 김대성으로 이들에 의해 불국사가 지어지고 신림을 초청하여 석불사에 주석하게 한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불국사는 고려시대에 유가업으로 기록된 유가계통의 사찰이다. 이곳에 어떻게 부석적손인 신림과 관련된 내용이 전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이는 삼모부인 측이 연기법사와의 연계를 통해 80화엄경 사경불사를 벌이자, 만월부인 측에서도 경쟁적으로 의상계 화엄승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결과 경덕왕대의 인물인 표훈대덕이 급기야 의상의 직제자로서 4영에까지 끼게 된 것이다. 경덕왕과 만월부인 측은 당시 경향각지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던 의상계 화엄종을 표훈을 매개로 왕경불교에 받아들여 이와 같은 현상을 도출해 낸 것이라 생각된다.

경덕왕은 당시 큰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진표를 왕경으로 초치하여 계를 받는 등 이들을 통제하고자 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후 헌덕왕의 왕자인 심지는 진표계 법상종에 투신하여 그 법손으로서 정통을 이어 동화사에 이어 창림사를 창건함으로써 진표계 법상종을 왕경 내로 포용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가 왕경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꿈꾸고 이를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호국불교를 지향하면서 교종불교 가운데 유가계불교를 주류로 하여 이후 새로운 사조인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을 포용하여 이들을 통제해 나갈 수 있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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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