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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자조를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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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언론의 위기’라는 말로 대학언론을 진단하는 건 부정확하다. 위기는 위험한 시기나 고비를 뜻하는데 대학언론은 그런 단계를 논할 시기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학언론 위기론은 대학가에서조차 족히 20년은 넘게 다뤄지고 있는 진부한 주제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대학언론의 역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뾰족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학언론인을 하염없이 움츠러들게 만든다.

 

대학언론 위기론은 이미 위기론이 아닌 현실이다. 수습기자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는 기자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가장 큰 고민거리다. 매년 줄어드는 인원을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웠음은 물론이다. ‘이 이상의 후퇴는 없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펜을 붙잡고 악착같이 버텨야 했다. 그러나 답보 상태의 대학언론에서는 그러한 노력들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대학언론이 독자들로부터 멀어진 탓이다. 미디어 환경은 지난 수년간 천지개벽 수준으로 변화했다. 대학 밖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구축하고 나섰다. 하지만 대학언론은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변화를 주도하지 못해 기자가 줄어들었고, 독자를 잃었으며, 이제는 매체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혹자는 대학언론이 사명을 다하고 사라질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미 몇몇 대학에서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됐다.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구조조정의 여파로 대학 자체의 존립이 흔들리게 된 상황에서 대학언론은 자연스레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겨우 살아남아도 대학 당국의 필요를 반영하라는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학생사회에서의 관심도 멀어져갔다. 대학언론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생들의 목소리를 담는 데 소홀했던 탓이다. 학교의 입장과 학생의 입장을 병존시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감각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조직은 구성원 공통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고, 시대적 맥락 속에서 필요를 구하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 구성원들이 대학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학언론인으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대학언론의 쇠퇴는 학원공동체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이해관계 당사자의 생존을 위한 변명으로 비춰질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대학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우선 언론의 본령(本領)인 ‘진실 추구’에 집중하고자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각오로, 할 말은 하는 대학언론으로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대학 구성원들에게 당당히 증명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지켜봐주시길 바란다. 2021년이 주는 미래적 분위기에 낙관을 싣고 〈계명대신문〉은 한 걸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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