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 속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흔히 이렇게 결의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망각이라는 폐기된 의식의 퇴적물로 사라지더라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문예 이론가이며 20세기의 탁월한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초기 논고에서 러시아의 문호 토스토예프스키의 역작 <백치> 주인공 무이쉬킨 백작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잊혀지더라도 이 인물만큼은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지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우리가 기억을 담보할 수 있는 기억의 저장소의 기능보다도 훨씬 더 초과하는 사태라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얘기한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존재의 요청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역설적으로, 폐기된 기억들의 퇴적물들이 오히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기억들의 서열을 규율하는 것은 아닐까?
‘기억’과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주제로 심도있게 접근한 영화가 있다. 바로 헝가리의 신예 감독이면서 탁월한 작품을 빚어내 제68회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나치의 만행이 극한으로 치닫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이 수용소에는 비밀리에 시체들을 처리하는 이른바, ‘존더코만도’라는 시체 처리반이 있었다. 이 작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상황을 일상으로 살아가야했던 그들의 기억이다. 이 극도의 잔혹함이 일상으로 처리되는 과정은, 영화 속 극도의 클로즈업 장치를 통해 외부적 환경으로의 시선 이동을 거부한 ‘존더코만도’들의 생존 방식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일상이 새로운 전환점을 부여한 것은 아들의 주검을 발견하고부터다. 주인공인 사울은 아들의 주검을 처리해야 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최선을 찾는다. 바로 이미 죽은 아들의 장례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현실의 사태가 우리의 기억을 훨씬 초과해 감당할 수 없는 무엇으로 달아나 버렸을 때, 이때부터 우리의 결의는 지엽적이 되고 마는가?’ 오히려, ‘잊을 수 없는 것’ 자체로 존재하게끔 요청할 수는 없는가?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철학의 제1원리로 “가능한 모든 것은 존재하기를 요청한다”라고 이야기했다. 현실태와 가능태의 관계 사이에서 요청이라는 개념이 생성되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것’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의 가능한 형태를 상상하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할 때, 그 모든 잔혹함의 원형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의식을 기각하는 행위의 반복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우슈비츠에서 진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이 무엇과 확연히 절연해야 릴케가 노래했던 삶의 전향적인 방향의 선회가 가능한지는 이제 우리 각자의 ‘잊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기억과 관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