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의 시 가운데, ‘방주 안에 넣어야 할 것(Into the Ark)’라는 시가 있다. 차이가 있다는 기쁨/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찬사/ 둘 중 하나만을 택하도록 줄여 놓은 것이 아닌 여러 선택/ 묵은 망설임/생각할 시간/ 언젠가는 이런 것들이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중략)나의 눈에 띈 것은 ‘언젠가는 이런 것들이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라는 시행이다. 어쩌면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은 암묵적으로 ‘소비’할 수 없는 건 없다는 무의식을 지닌 채 숨 가쁘게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는 앞의 시에서 제시하듯이 우리에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 곧 ‘생각할 시간’ 자체에 대한 구출동기를 야기하는 역설을 낳게 한다. 이런 질문들을 구체화시킨 영화 ‘터널’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여러 유비적 표현을 통해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정수는 자신이 주문한 양보다 훨씬 더 주유를 한 주유원에게 항의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주유원은 제대로 걷기에도 벅찬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서둘러 그
현재의 한국사회는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실종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휘발성 강한 일회적 감탄은 존재하지만 그 감탄이 타인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으로 이전되는 경의로 이어지기는 참으로 인색하기 짝이 없다. 왜 이러한 현상이 빚어졌을까? ‘프랑코포니아’를 보면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깊이에서 표현되는 마음 속 진정한 표현인 ‘경의’를 다시 추억했다. 이 영화의 중심 기조로 유지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심지어 권력의 위계에서마저 현저한 차이가 나는 두 인물간의 상호 진정한 ‘경의’를 매개로 윤활유처럼 흐르는 품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영화 ‘프랑코포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침공하여 점령군의 입장으로 위세 당당하게 파리 루브르 미술관을 접수한 독일군 중에서 역사적 전리품을 담당하는 메테르니히 백작과 당시 루브르 미술관 관장이던 자크 조자르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로의 경의’를 다룬 영화이다.이 두 인물은 단순히 미술품을 지켜내기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아님을 러시아의 거장 알렉산더 소코로프 감독은 역설한다. 감독이 보여 주려한 진실은 국가와 예술, 곧 권력과 아름다움에 대한 은유이다. 권력이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는
태풍이 기대되었다. 폭염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숫제 모두들 바람 많은 태풍을 기대한 까닭이다. 나는 주말 아침, 연로한 어머니를 찾아뵈기로 했다. 이 폭염에 강건하게 계시는지 염려되었다. 연신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머니 집에 다다랐을 때 이 폭염의 더위에 마당에 나오셔서 소철나무에 물을 대고 계신 어머니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첫 인사가 나오고 말았다. 자식들은 모두 제 마음과 달리 굼뜨고 연로한 부모에 대한 핀잔이 습관처럼 배어나오곤 할 때 쉽게 그 마음을 부모가 이해하리라고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이 핀잔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쓰라린 추억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리라는 사실을 정작 자식들은 알지 못한다. 나도 지난 주말에 그러했다.그날, 나는 어머니의 부채질을 받아가며 수박 반통을 어머니와 나누어 먹었다. 멀리서 아파트 단지의 늦여름 매미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고 어머니의 미소는 그 매미 울음소리에 묘한 서정을 더하고 있었다.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는 일본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선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6년 최신작이다.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뚜렷한 작가의식을 지니고 있는 감독의 시
한평생 제주에서 해녀로서의 삶을 살아온 계춘할망은 손녀 혜지를 자신의 유일한 삶의 낙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서울에서 손녀를 잃어버리고 12년 동안 손녀를 찾지 못한 채 홀로 오매불망 손녀를 기다리며 살아온 노파다. 이 영화는 계춘할망에게 12년 만에 실종된 손녀 혜지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오로지 12년 전의 혜지에게 머물러 있는 할머니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인 혜지는 이미 10대 고교생으로 성장한 소녀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혜지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향상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혜지의 감추어진 12년간의 생활은 점점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의심이 사실로 드러난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보여지는 용서와 화해를 다룬 한국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영화 속에서 꼬마 혜지는 계춘할망에게 자주 묻곤 한다. “바다와 하늘 중에 무엇이 더 넓을까?” 할머니의 대답은 늘 같다. “당연히 하늘이 훨씬 넓지!” 하지만 12년 만에 돌아온 혜지와의 서먹한 관계 속에서 숨겨진 혜지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바다는 하늘을 품고 있기에 바다가 더 넓다.”
이제 막 15살이 된 조카 녀석이 휴일 오전을 즐기고 있는 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때, 덕수궁 즉조당 일원의 아름드리 살구나무에 핀 연분홍 살구꽃의 자태를 올려다보고 있을 즈음이었다.‘삼촌, 귀향 봤어요?’나는 이미 영화를 보았지만 녀석이 어떻게 나오나 싶어 말을 아꼈다.‘왜?’ ‘···이상하게, 자꾸 기억나요···.’ ‘뭐가?’‘죽어간 제 또래의 소녀들요···.’나는 올려다보던 살구꽃의 여린 빛깔에 방금 보내온 조카의 말이 더해져 뭔가 아득해지는 현기증을 느낀 것 같다. 조카 녀석은 이제 막 사춘기를 통과하는 자신의 섬세한 정서 위로 예고 없이 스며드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빚어진 잔혹한 세상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오랜 시차를 두고 이제야 자신의 감수성 안으로 도래함을 느꼈던 것이다.영화 은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며, 가슴 아픈 우리 현대사에 가혹하리만치 가해졌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만행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유린의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 아직도 치유되거나 화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십대 소녀였던,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요
우리는 삶 속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흔히 이렇게 결의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망각이라는 폐기된 의식의 퇴적물로 사라지더라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문예 이론가이며 20세기의 탁월한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초기 논고에서 러시아의 문호 토스토예프스키의 역작 주인공 무이쉬킨 백작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잊혀지더라도 이 인물만큼은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지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우리가 기억을 담보할 수 있는 기억의 저장소의 기능보다도 훨씬 더 초과하는 사태라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얘기한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존재의 요청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역설적으로, 폐기된 기억들의 퇴적물들이 오히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기억들의 서열을 규율하는 것은 아닐까? ‘기억’과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주제로 심도있게 접근한 영화가 있다. 바로 헝가리의 신예 감독이면서 탁월한 작품을 빚어내 제68회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라즐로 네메스의 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나치의 만행이 극한으로 치닫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봄날의 담장 너머로 해를 보는 듯 꽃망울들의 한결같은 방향은 따스함을 향하고 있었다. 훈풍이 제법 차창 밖으로 부는지 길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활짝 열려있다. 필자의 동네는 산동네를 경유하므로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조그마한 버스 안에서 뒷자리에 오기종기 모여 앉은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연신 학급내의 남학생 얘기로 시끄럽다. 나는 그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어서 고스란히 그들의 잡담에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뜬금없이, 언니들을 따라나선 것으로 보이는 아직 취학 이전의 꼬마 여자애의 한마디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언니, 사랑에 빠진다는 게 뭐야?”한참, 학급 내 남자애들 얘기로, 누가 누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여자애들은 순간, 그 꼬마 여자애의 뜬금없는 질문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그건,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음···시적인 표현이야.”“시적인?”꼬마 여자 아이는 물러서지 않고 언니의 대답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그러니까, 쉽게 할 수 없는 거야. 시적인 건.” 언니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동생에게 젤리 봉지를 뜯어 귀찮은 동생의 입을 틀어막는다.영화 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서정적이며 동시에 그가 지닌 여린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치를 않아”-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1898-1937)-사랑에 대한 영화를 접할 때 갖게 되는 질문 하나가 여전히 유효하게 이 영화에도 소환된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일까?’그러나 문제는 많은 현대의 연인들이 겪는 삶의 행로, 즉 만남, 연애, 결혼 그리고 불륜이라는 가혹한 경로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른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는 자조 섞인 인생에 대한 절망은 깊이 패인 상처로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적개심을 품게 하는 역설로 돌변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인 피에르는 아내 마농과 함께 협업하며 가난하지만 목표와 지향이 같은 생활을 영위해 간다. 목표와 지향이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남자인 피에르의 착각이다. 여기서 영화 전반부에 스며있는 가부장적인 위계의 시선이 연인이며 부부인 이 두 사람 사이로 간극을 벌리며 균열을 일으킨다. 뭔가 힘의 질서가 두 사람 사이에서 피에르에게 기울어 있는 미묘한 차이를 감독인 필립 가렐은 역시 거장다운 섬세한 연출로 표현해 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피에르는 우연히 만난 젊고 지성적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