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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2016)

- 그렇게 가족이 된다

태풍이 기대되었다. 폭염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숫제 모두들 바람 많은 태풍을 기대한 까닭이다. 나는 주말 아침, 연로한 어머니를 찾아뵈기로 했다. 이 폭염에 강건하게 계시는지 염려되었다. 연신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머니 집에 다다랐을 때 이 폭염의 더위에 마당에 나오셔서 소철나무에 물을 대고 계신 어머니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첫 인사가 나오고 말았다. 자식들은 모두 제 마음과 달리 굼뜨고 연로한 부모에 대한 핀잔이 습관처럼 배어나오곤 할 때 쉽게 그 마음을 부모가 이해하리라고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이 핀잔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쓰라린 추억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리라는 사실을 정작 자식들은 알지 못한다. 나도 지난 주말에 그러했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부채질을 받아가며 수박 반통을 어머니와 나누어 먹었다. 멀리서 아파트 단지의 늦여름 매미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고 어머니의 미소는 그 매미 울음소리에 묘한 서정을 더하고 있었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는 일본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선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6년 최신작이다.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뚜렷한 작가의식을 지니고 있는 감독의 시선이 연신 이 영화에서도 발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따스한 시선이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워졌다. 영화의 주제는 ‘한때, 자신이 바라던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거에 딱 한 번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는 잊혀진 작가이자 흔히 사회에서 말하는 ‘잉여’가 되어가는 료타는 이혼한 아내와 그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들 싱고가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료타의 어머니 집에서 하루를 보내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내내 룸펜이나 다름없는 생을 살아가는 료타의 일상이 그려진다. 그가 독백처럼 써놓은 그의 메모,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는 문구는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성장해 버린 료타의 무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해 놓고 있다. 마음씨 좋고 사람 좋아하며 삶에서 서정적인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료타의 실존은 이미 이 성과 사회의 첨단을 걷는 현대 일본 사회에서 끔찍한 잉여로서의 삶을 보증하는 징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들을 감독은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는 세심한 배려의 섬세함으로 묘사한다. 마치 이 세상에는 소중하지 않은 생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그래서 오히려 정작 너무나 쉽게 망각하는 진리를 매우 담백하고 고개 끄덕여지는 긍정으로 이끄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이곳에 바로 감독의 역량이 숨어있는 것이리라. 료타의 어머니 요시코는 료타와 같은 나이인 귤나무를 서민 주택 베란다에 기르고 있다. 단 한 번도 열매 맺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아들, 료타에게 따뜻하게 이러한 말을 건넨다. 바로 이 대목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