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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L’ombre des Femmes), 2015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치를 않아”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1898-1937)-

사랑에 대한 영화를 접할 때 갖게 되는 질문 하나가 여전히 유효하게 이 영화에도 소환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일까?’

그러나 문제는 많은 현대의 연인들이 겪는 삶의 행로, 즉 만남, 연애, 결혼 그리고 불륜이라는 가혹한 경로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른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는 자조 섞인 인생에 대한 절망은 깊이 패인 상처로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적개심을 품게 하는 역설로 돌변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인 피에르는 아내 마농과 함께 협업하며 가난하지만 목표와 지향이 같은 생활을 영위해 간다. 목표와 지향이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남자인 피에르의 착각이다. 여기서 영화 전반부에 스며있는 가부장적인 위계의 시선이 연인이며 부부인 이 두 사람 사이로 간극을 벌리며 균열을 일으킨다. 뭔가 힘의 질서가 두 사람 사이에서 피에르에게 기울어 있는 미묘한 차이를 감독인 필립 가렐은 역시 거장다운 섬세한 연출로 표현해 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피에르는 우연히 만난 젊고 지성적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아내가 있는 피에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녀를 만나게 되고, 공교롭게도 엘리자베스로부터 아내의 불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영화는 내내 피에르 내면의 허위와 피로감을 다룬다. 허위는 지식인으로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정작 내면에서는 아내 마농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그 새로움은 아내가 자신에게 현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발견하려는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타인의 얼굴 아닌가. 이 의지를 가지려면 수고로움을 통과해야 한다. 금방 휘발되어 없어지고 마는 수고로움 없는 사랑이라는 탐닉의 흔적은 뼈아프게 우리에게 공허함이라는 상처로 귀환하고 만다. ‘그 사람’ 없이는 공허하며 의미가 점점 축소되고 급기야 내 자신마저도 서서히 닫혀져 가는 것을 경험할 때 사랑의 정의는 새롭게 부상한다.

사랑은 뭔가 절대적으로 내 마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중심이다. 이 중심이 상대를 위해 기꺼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며까지 그 대상의 가치를 나누게 한다. 그런데 이런 중심의 힘은 상대가 나를 실망시켰을 때 오히려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 사랑의 중심이 중심일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위는 바로 그 실망시키는 부분까지이기 때문이다. 이 실망스런 부분이 사랑으로 덮여지고 이해로 받아들여졌을 때 이 힘은 점점 더 절대적인 중심에 서게 되는데, 이 절대적인 중심이 인간의 가슴 안에서 최초로 타자를 자기 자신 안으로 거주하게 하는 영롱한 공간 하나를 마련하게 된다. 그것은 내어줌이라는 가치이다. 피에르와 마농은 이 작은 공간을 다시 회복하려는 과정 중에서 서로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니, 조지 거슈인의 금언은 틀렸거나 치환되어야 한다.

“가지고 나면 원하질 않았던 것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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