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에서 심은경이 짝사랑하는 원빈 닮은 오빠가 헤드셋을 살포시 머리에 얹어주면 ‘Reality’라는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와 정신이 몽롱해진다.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노래와 분위기, 그리고 잘 생긴 그때 그 녀석. 이 장면은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의 한 장면을 패러디 한 것이다. 1980년대 소년소녀들을 하나로 대통합시켜주었던 책받침의 여신 소피 마르소. 당시 10대 여신 트로이카의 두 축이었던 브룩 쉴즈와 피비 캐츠가 강력한 도전장을 던졌건만, 할리우드 본고장의 하이틴 스타들도 감히 따라잡지 못했던, 헝클어진 머릿결과 털털한 옷차림이 미치도록 멋졌던 파리지엔느 소녀.
한번도 정식으로 국내에 개봉되지 않았던 프랑스 영화 <라붐>(클로드 피노트, 1980)이 이번에 극장 개봉한다. 80년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알고픈 자식 세대가 함께 즐길만한 이 영화에서 두 세대의 서로 다른 사랑 방정식을 확인하겠지만, 사랑에 대해 고뇌하는 청춘의 아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어느 누구든 쉽게 이 영화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사춘기 소녀 빅(소피 마르소)이 파리로 전학을 온다.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중학생 소녀들은 잘생긴 남자선생을 흘금흘금 엿보고, 평소 눈여겨 보던 동급생 인기남들의 데이트 신청에 겉으로는 도도하게 반응한다. 어느날 친구의 파티에 가게 된 빅은 마티유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소녀의 인생이 그리 순탄하게 풀릴 리 없다. 늘 연애상태처럼 귀여웠던 부모는 별거에 들어가고 마티유는 동네 최고 미소녀에게 한눈을 판다. 성에 눈 떠가던 빅은 짜릿한 첫키스와 황홀한 밤을 기대하며 친구와 세련된 할머니의 코치를 받아 작전을 세운다.
이 10대 영화는 착한 영화가 아니다. 근엄하게 아이들에게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갈 것을 충고하지도 않고, 성실하게 살 것을 교훈으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영화는 이유 없는 일탈과 반항을 인정하고 아이들의 성에 대한 관심을 솔직하게 담는다. 사랑받기 원하는 부모들의 성숙하지 못한 애정행각도 엄격한 도덕률로 재단하지 않는다. 청바지와 청자켓으로 통일된 촌티 패션 코디는 1980년대의 들뜨고 호들갑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준다. 영화는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가족은 위험해지고 아이들은 불량해지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스트레스가 주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가끔씩 보이는 불안의 틈은 리즈 시절의 소피 마르소의 미모로 채워진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그레타 가르보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보고 찬탄해 마지않은 것처럼 소피 마르소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왜 그녀가 데뷔하지마자 지구촌 아이들을 흥분으로 들뜨게 했는지 입증해준다.
1980년대 그 시기는 어마어마하게 치열해진 경쟁체제의 신자유주의 시대인 지금보다는 비할바 없이 낭만적이어서, 시대의 자유로움과 여유가 영화를 한층 편하게 감상하게 만든다. 소피 마르소의 매력적인 미모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영화에 가득 흘러넘치는 음악과 춤과 파리 거리가 담은 낭만적 공기로 인해 가슴이 설렌다. 마지막 소피 마르소의 표정에서는 팜므파탈의 향기나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