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박근형 씨의 ‘너무 놀라지 마라’는 한 노인의 자살로 시작되는 연극이다. 전단지 뒷면에 쓰인 한 줄짜리 유서. ‘너무 놀라지 마라.’ 자신의 죽음이 미안한지, 자식들에게 짐이 된 게 마음에 걸리는지, 노인은 가슴에 묻은 많은 이야기를 접어놓고 목을 맨다.
이 연극은 노래방 도우미인 며느리,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둘째 아들, 영화 찍는다며 집을 나간 첫째 아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린 아내 등이 벌이는 ‘놀랄 만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추하고, 인간이라기에 너무나 가혹한 일들이 어찌나 태연하게 진행되는지 진땀이 다 흐르는 연극이었다.
최근 이런 느낌의 영화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2014)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기억을 쫓아가는 연작으로 ‘액트 오브 킬링’(2012)의 후편인 셈이다. ‘액트 오브 킬링’이 가해자 입장에서 그렸다면,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의 시선에서 그린 작품이다.
인도네시아는 350년의 식민시대를 겪은 나라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의회를 탄압하고 사실상 종신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의 독재정권은 군부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군부는 쿠데타를 공산당이 벌인 일로 몰면서 숙청에 나섰고, 여기엔 무고한 양민들도 포함됐다.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폭력집단까지 가세해 무차별적인 학살이 진행됐다. 학살을 주도했던 어떤 이는 300만명 넘게 죽였다고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서방은 이 학살을 모른 체 했고 학살범은 지금까지 영웅 대접을 받으며 부귀를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학살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학살 가해자들을 찾아 50년 전 학살을 영화로 재현해달라고 제안한 뒤 그들이 영화를 준비하고 찍는 과정을 ‘액트 오브 킬링’에 담았고, 당시 형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 나선 동생의 이야기를 ‘침묵의 시선’에 담았다. 감독은 두 편의 색깔과 느낌을 달리한다. 하나는 살인 행위가 아직 위세를 떨치는 동적 느낌으로, 그리고 하나는 한을 품고 살아가는 시선의 정적 느낌으로 그려냈다.
놀라운 것은 살인을 정당화하는 가해자이다. 심지어 TV 토크쇼에 나가서도 얼마나 자신들이 효율적으로 살인을 했는지 자랑한다. 탁자 다리를 목에 걸쳐놓고 위에 올라타 피해자가 숨이 막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노래를 불렀다는 대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분노가 느껴진다. 그들은 자신을 미국으로 초청해 큰 상이라도 주는 줄 알았다고 했다. “비행기가 힘들면 크루즈 여행이라도 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들의 광태를 TV 모니터로 지켜보는 동생의 텅 빈 시선은 관객에게 엄청난 무게를 짊어준다.
과연 정치와 이념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더 큰 것일까. 그 어떤 죄책감과 양심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이 태연한 그들의 행위를 다큐멘터리는 ‘너무 놀라지 마라’면서 던져주는데, 그래서 더욱 피가 말리고, 오금이 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