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담장 너머로 해를 보는 듯 꽃망울들의 한결같은 방향은 따스함을 향하고 있었다. 훈풍이 제법 차창 밖으로 부는지 길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활짝 열려있다. 필자의 동네는 산동네를 경유하므로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조그마한 버스 안에서 뒷자리에 오기종기 모여 앉은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연신 학급내의 남학생 얘기로 시끄럽다. 나는 그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어서 고스란히 그들의 잡담에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뜬금없이, 언니들을 따라나선 것으로 보이는 아직 취학 이전의 꼬마 여자애의 한마디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니, 사랑에 빠진다는 게 뭐야?”
한참, 학급 내 남자애들 얘기로, 누가 누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여자애들은 순간, 그 꼬마 여자애의 뜬금없는 질문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
“그건,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음···시적인 표현이야.”
“시적인?”
꼬마 여자 아이는 물러서지 않고 언니의 대답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쉽게 할 수 없는 거야. 시적인 건.” 언니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동생에게 젤리 봉지를 뜯어 귀찮은 동생의 입을 틀어막는다.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서정적이며 동시에 그가 지닌 여린 감수성을 유려한 화면에 담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래간만에 맛보는 나레이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시인 윤동주가 자신의 시를 한 편 한 편 완성해 가는 과정과 맞물려 읽어 내려가는 시의 내용은 관객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잊혀진 우리 삶의 정서를 되돌린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윤동주의 삶과 그의 사촌 송몽규의 애환을 담은 서사구조로 진행되지만, 의미상의 주인공은 식민시대의 슬픈 젊은이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식민지 시대를 살다간 실패한 청춘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결곡한 삶에 닿아 있어 서정적인 그들의 비참함이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미덕이 존재한다.
부끄러움이 수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마음속 잔영으로 남아있는 이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시인 동주의 가슴 속에 비록 불안하지만, 여전히 가슴 데워지는 사랑이 그 잔혹한 시대에도 사랑으로 기능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가 주는 역설적인 환경은 시인 윤동주로 하여금 식민시대를 관통하는 당대의 젊은이들의 회한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쉽게 쓰여 질 수 없는 말과 글이 ‘시’라고 정의한다면 어찌, 당시 시인 윤동주가 자신의 시를 쉽게 썼을까마는 당대에 젊은이들이 겪고 있었던 비인간적인 고통에 견줄 때 지속적으로 시인을 괴롭혀 온, 고통에 동참하고 있지 못한 자신의 내면적 고백이 아니었겠는가.
현대는 금방 휘발되고 마는 말을 쉽게 말하고 쉽게 써버리는 것을 일상으로 간주하는 세대이다. 마을버스에서 만난 어린 여학생들의 무의식 속에 면면히 간직되어 오는 시의 정신은 ‘쉽게 말할 수 없는’ 것 속에 소중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쉽게 쓰여질 수 없는’ 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을 간직한 심장 박동의 고유한 인간의 리듬이 바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