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15살이 된 조카 녀석이 휴일 오전을 즐기고 있는 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때, 덕수궁 즉조당 일원의 아름드리 살구나무에 핀 연분홍 살구꽃의 자태를 올려다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삼촌, 귀향 봤어요?’
나는 이미 영화를 보았지만 녀석이 어떻게 나오나 싶어 말을 아꼈다.
‘왜?’
‘···이상하게, 자꾸 기억나요···.’
‘뭐가?’
‘죽어간 제 또래의 소녀들요···.’
나는 올려다보던 살구꽃의 여린 빛깔에 방금 보내온 조카의 말이 더해져 뭔가 아득해지는 현기증을 느낀 것 같다. 조카 녀석은 이제 막 사춘기를 통과하는 자신의 섬세한 정서 위로 예고 없이 스며드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빚어진 잔혹한 세상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오랜 시차를 두고 이제야 자신의 감수성 안으로 도래함을 느꼈던 것이다.
영화 <귀향>은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며, 가슴 아픈 우리 현대사에 가혹하리만치 가해졌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만행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유린의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 아직도 치유되거나 화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십대 소녀였던,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요 테마다. 하지만 정작 잊을 수 없는 것은 가녀린 그 소녀들이 품었을 저마다의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잔인하게 파괴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정, 그 속에 서 폭로되는 인간의 타락이다. 영화는 시작부에서 아름다운 우리들의 전통, 곧 가족의 사랑 그리고 어린 소녀들의 꿈들이 수려한 우리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미려하게 펼쳐진다. 주인공 열네 살 정민은 이러한 아름다운 강산에서 그 또래가 다 그러하듯이, 소녀들의 장난과 웃음으로 보는 이에게 흡족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1943년에 일었던 일제의 대대적인 계획, 곧 군 위안부를 위해 여린 소녀에 불과한 정민은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열차로 연행되고 그곳에서 또래 소녀들을 만나면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내몰리게 된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공교롭게도, 영화 귀향을 다시 떠올리게 된 현장이 아름다운 살구꽃이 이제 막 꽃잎을 열고 있는 조용한 고궁의 뜰 녘에서였다. 나는 여린 꽃잎들을 보면서 조카 녀석의 문자를 다시 들여다봤다. ‘자꾸 기억나서요···.’
우리가 타인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함은 ‘함께 고통을 느끼려고 하는 마음(compassion)’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조카 마음 안에서 “자꾸 기억이 나는” 행위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통을 겪은 그 소녀들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신다. 그들의 짓밟힌 꿈과 희망과 그리고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그분들의 인권은 우리가 함께 그들의 고통을 느끼려고 하는 마음의 회복 안에서 힘을 얻고 추진력을 수반할 수 있다. 잘못된 역사는 우리가 기억해 내려 하지 않을 때, 그 오류로부터 민중의 신음을 야기하며 그 첫 번째 희생자는 늘 가지지 못한 자들임을 우리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