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은 아련함일 수도, 기쁨 또는 두려움일 수도, 분노일 수도 있다. 단 한 가지의 단어임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오르는 것은, ‘기억’이라는 단어가 가진 포용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의 다양성에 힘입어 말하건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의 기억이 나의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지난 3년 동안의 대학생활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다짐은 순전히 나를 위해서이다. 이것에 대해 혹 누군가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무슨 기억이라도 있어야 실패 없이 지나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기억의 의미는 순전히 내 입장에서 말하는 ‘익숙함’에 대한 경계이다.
이제 막 23살의 문턱 앞에 서서 돌아본 나의 지난 3년은 별 탈 없었다. 매일 매일이 무난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 일(취업을 제외하곤)에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사(死)학년(4학년)이 되었고 20대의 출발선에서부터 내 몸은 나의 3년을 그대로 흡수했다.
그렇게 피클처럼 나는 ‘익숙함’에 절여졌다. 익숙함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익숙함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고 사람은 한 번에 변하지 않는다는 22년간의 인생 경험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매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매번 같은 다짐을 했다. 익숙함은 ‘새로움은 불편하다’는 내 몸과 뇌의 기억이 만들어낸 습관이다.
돌아보면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과 앞으로 펼쳐질 앞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드라마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후배들이 따르는 멋진 선배가 되고 싶다는 바람들은 새로움으로써 그 때의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익숙함 끝에 지금 나는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최고학년이 되었다.
이렇게 나를 한결같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던 ‘익숙함’의 탓을 하자면, 늦게 일어나서 허둥지둥 준비해 학교에 오는 것도 익숙함 때문, 체중관리를 한다고 해놓고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익숙함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었다. 기억을 함으로써 나는 익숙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고 익숙함이라는 틀 속의 나태함과 자연스러움은 내가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막았다.
기억을 하지 않겠단 내 결심 뒤에는 다시 느껴야할 좌절감과 허탈함, 분노가 이에 뒤따를 것임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새로움은 언제나 실패와 실수를 만든다. 실패와 실수는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반대로 처음 한 경험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은 기쁨을 준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거쳐야할 내 실패와 실수에 대한 반복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움직였던 그 원동력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기억을 하고 싶지 않다. 해가 달로 바뀌어 가는 시간동안 그림자는 점점 그 모습을 잃는다. 해가 지날수록 사라져가는 내 그림자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 익숙함이라는 길 위에 가로등을 세워둔다. 앞으로 느낄 새로움을 배우고 즐기기 위해서 나는 새로움을 경계하겠다. 기억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는 기억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