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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3호 독자마당] 아직 이른 ‘봄’

윤동주는 유명한 시인이다. 역사적으로, 대중적으로, 못다 피운 꽃 하나는 해방이라는 다른 꽃이 핀 후에 민들레 씨 마냥 널리 퍼져나갔다. 나도 아마 민들레 꽃가루를 맞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몸속으로 그는 스며들어왔다.


우리는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지만, 그만큼 말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는 악영향도 존재한다. 4차 산업혁명까지 운운하고 있는 시기에도 슬픔은 사람 간의 이별이라는 것에 쫀득쫀득하게 결속되어 있다. 마치 힘만 주면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떼어내도 나머지 손에 남는 것은 좋은 것이라 할 수도 없고, 나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에게 어릴 적 모든 것이 ‘순이’였다(「사랑의 전당」 中). 


‘봄’(春)을 노래하고, ‘봄’을 그리다가, 헛봄이 아닌 역사의 ‘봄’을 보기 몇 개월 전에 세상과 이별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아른하게 높기도 한 하늘의 별빛을 따라 1945년 2월 16일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는 내게 시를 본격적으로 쓸 수 있게 해 준 장본인이다. 사실 윤동주를 논할 때에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면 굉장히 곤란하고 실례이다. 슬픔을 수치화할 수 없고, 같은 역사를 반복해 겪을 수는 없겠지만ㅡ겪으면 더더욱 안된다ㅡ현대시를 읽는 사람들이나 SNS에 올라오는 글귀들을 감성적으로 향유하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윤동주의 시를 바라보면 어디까지 소모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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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