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나는 대학생활을 위해 타지로 내려와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 일정들을 거치며 나는 점점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받아들여갔다. 타지에서의 대학생활이 걱정되긴 했지만,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긴 싫은 마음에 혼자서 열심히 살아가 보려 다짐했다.
그때 나의 다짐과 함께 대구로 내려와 지금까지 내 책상의 일부분을 채워주고 있는 분홍색 돼지 저금통이 하나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현금으로 받았다. 온라인 결제가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부모님 명의로 된 잘 사용하지 않는 카드 한 장이 내 신용의 전부였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확실히 이전과는 씀씀이가 달라졌고, 처음으로 온전히 내 이름으로 된 계좌를 개설하고, 마음에 드는 카드를 골라 발급받았다.
그렇게 나는 점차 현금보다는 카드를 사용하는 일이 훨씬 잦아졌고, 지금은 거의 카드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현금을 손으로 만지는 일, 동전을 직접 손에 쥐는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오늘 책상 앞에 앉아 오랜만에 눈에 들어온 돼지 저금통을 열어보다가 문득 고등학생인 내가 돼지 저금통을 바라보던 시선과 지금의 내가 돼지 저금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달라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몇 달에 한 번 꼴로 아주 가끔 열어보지만 그때는 저금통을 꽤나 자주 만졌다. 매주 현금으로 버스카드를 충전했고, 현금으로 매점에서 무언가를 사 먹었다. 그렇기에 주머니엔 늘 현금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지갑을 정리하며 그간 쓰고 남아 있는 동전들을 돼지 저금통에 몽땅 집어넣었다. 그리고 후에 이 저금통이 꽉 차게 되면 그 돈으로 무얼 할 건지 저금통 앞면에 눈에 잘 보이게 적어 두었다. 그래서인지 돈을 넣을 때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때 저금통에 적었던 내용들을 떠올려 보면, ‘사랑하는 동생 졸업선물, 동생 생일선물, 엄마, 아빠 생신 선물, 할머니, 할아버지 드릴 선물’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동생 생일선물’을 살 시기에 이래저래 돈 쓸 곳이 많아서 한창 돈이 없었는데, 학교에서 매점 가는 일도 줄이고, 저녁밥도 가장 저렴한 메뉴를 사 먹으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돈을 모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심히 모아서 동생에게 새빨간 지갑을 사주었다. 그때 선물을 받던 동생의 표정과 그 방 안의 따뜻한 공기는 아직도 꽤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좋은 선물을 더 많이 해 줄 수 있게 되었지만, 왠지 그때만큼 행복하고 뿌듯한 기분은 느낄 수 없었다. 저금통을 깨고 그 돈으로 선물을 살 생각을 하면서 저금통에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그런 과정의 재미가 사라져서 그런가? 솔직히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You Only Live Once’ 등의 말들이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 버린 요즘 같은 시기에 무언가를 위해 나의 지금을 아낀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은 꽤나 기분 좋은 일로 남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지만, 그만큼 결과는 달콤함에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저금통에 그냥 동전 한 닢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행복’을 차곡차곡 저금해 두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