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고흐의 10년, 시간이 없다고?

아무리 예술 쪽에 문외한이라도 빈센트 반 고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록 37세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그토록 위대한 창조자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골 들판을 뛰어다니곤 했던 그는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일을 거들며 미술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후 런던과 파리의 화랑에서 일하면서 예술적 감성을 일깨울 수 있었다.

고흐는 미술품을 놓고 장사를 하는 모습이 점점 싫어졌다. 23세 무렵 책방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던 고흐는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만다.

그는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7세 무렵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먼저 데생과 수채화에 전념했다. 그리고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을 만나 회화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혀 나갔다. 그림은 점점 대담해졌다. 그는 주로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다. 이 주제들은 가진 것 없는 자와 그들의 일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33세 때 고흐는 문득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거기에서 고흐는 로트렉과 고갱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쯤 지나자 고흐는 도시생활에 점점 싫증이 났다.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다.”

그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몸도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어떤 분위기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고스란히 표현하기 위해 격렬하게 붓을 움직였다.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고 싶었던 그는 ‘노란 집’ 한 채를 빌렸다. 고갱이 이곳에 합류했지만 사사건건 다투는 바람에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고흐는 정신병원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고, 그의 그림은 점점 몽환적이 되어 갔다. 자신의 마침표를 예감했던지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북부 지방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시골마을로 돌아간 고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러한 재기의 몸부림은 얼마 가지 못했다. 고독도 병도 이겨 낼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을 향해 권총을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리고 따뜻했던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만성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고흐가 남긴 작품은 800여 점의 유화와 700여 점의 데생이었다. 하지만 생전에 팔린 작품은 달랑 데생 1점. 고흐가 불멸의 그 많은 그림들을 창조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겨우 1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너는 시간이 없다고?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