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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하라

“나는 사업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은 가장 매혹적인 예술의 하나다.”

‘팝아트’라는 말을 미술의 한 장르에다 올려놓은 앤디 워홀은 그렇게 말했다. 얼핏 예술과 사업은 그리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낱말이지만 그는 당당하게도 스스로를 미술사업가라고 불렀다.

워홀에 대한 비판은 만만치 않았다. 상당수의 비평가들은 그를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에 물든 사기꾼쯤으로 대했다. 그는 그런 비난들을 수긍했다. 예술품에 따라다니는 천재와 영감이라는 아우라를 부정했고,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부정했다.

“나의 예술은 거짓이었다. 종이에 아무렇게나 선을 긋고 관념적인 단어를 나열하면 관객들은 보물을 얻은 듯 그림을 거꾸로 걸어두고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작업을 돕는 이들을 ‘예술 노동자’라 칭했다. 그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남의 스튜디오를 방문한다고 털어놓으면서, 미술 잡지를 보는 것이나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 것이 뭐냐고 되물었다. 때로는 자신의 사인을 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인 드렐라(Drella)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캠벨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병과 브릴로 비누상자, 마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오쩌뚱의 모습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냈던 워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작품 ‘오렌지 마릴린’은 경매가가 150억 원을 넘는다고 한다. 그가 비난 속에 대량생산해서 팔았던 수많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의 ‘공장’에 있던 소도구들마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워홀이 끝내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자 언론은 뒤늦게 많은 유산이 미술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워홀의 뜻이었음을 크게 보도했다.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콜라다”.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현대 문화의 정체성을 표현해 보였던 앤디 워홀. 그는 아무래도 ‘사기꾼’은 아니었을 듯하다. 진짜 사기꾼이란 적어도 자신의 서명을 남에게 맡기는 자가 아니라 남의 것에 자신이 서명을 하는 자일 테니까. 그는 예술이란 더 이상 고고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예술가란 거지 같은 옷을 입고서 고뇌에 찬 표정으로 빵과 물감을 바꾸러 가는 근대적 인간상이 아님을 온몸으로 보여준 통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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