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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커다란 예술가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폴 고갱도 애초부터 그림으로 성장하지는 않았다. 17세가 된 1875년부터 6년 동안 화물선을 탔던 고갱은 23세 때 파리의 한 증권회사에 취직했다. 거기에서 미술품 소장가를 알게 되면서 그림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동료 직원과 화실에 다니며 습작을 하던 그는 28세 때 그린 ‘비로플레 풍경’이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그것이 입선되고 만 것이었다.

고갱은 주로 휴일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1883년 증권회사가 망하면서 직장을 잃게 되자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는 매일 그림을 그리자”
아내와 4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수입은 제로였다. 그로부터 1년 뒤 고갱은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이사했으나, 처가 식구들은 직업도 없이 그림만 끼고 사는 그를 홀대했다. 결국 결혼 생활을 깨고 1885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예술을 위해 생을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 즈음 고갱은 두 가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하나는 5세 아래인 고흐라는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마르티니크의 풍경이었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생각이 자신과 비슷한 열정적인 인물이었고, 여행지 마르티니크는 찬란하고 관능적인 원시의 색채였다.

“원시미술은 자연을 이용하지만 정제된 미술은 자연을 섬긴다. 자연은 사람들을 찬양하게 하여 그 영혼을 실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주의라는 가증스러운 오류로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고갱은 평면의 그림이 마치 실재처럼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기법을 중단하고 그림을 통해 특별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인상파와의 결별이었고 원시주의와의 해후였다. 그는 제자 폴 세뤼지에에게 말했다.

“저 나무가 무슨 색깔로 보이지? 저건 녹색이잖아. 그럼 녹색으로 칠해. 저 그림자는 파란색 같지 않나? 그럼 주저 말고 파랗게 칠해”
고갱은 단순한 색채의 조화를 통해 쉽고 분명한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그림이 즐거운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또한 영혼을 파괴하는 물질주의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문명세계에서 고통받는데, 나는 야만세계에서 활력을 얻고 있소”
고갱이 50세 때 타히티에서 그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그의 사상을 함축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차츰 그의 미술사상에 동의하는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었다. 뭉크도, 앙리 마티스도, 그리고 젊은 피카소도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원주민들을 옹호하기 위해 당국과 투쟁하는 그 예술정신의 아름다움을 따랐다.

영혼이 빠진 행위는 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최고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눈치로 지내려 하지 말고 네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을 기꺼이, 뜨겁게 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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